
ICCT, 2년 가까이 끈질기게 추적해 사기 입증
기부금으로 운영되며 지구촌 1000만 곳 활동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지구촌을 경악시킨 폭스바겐의 ‘디젤 사기’를 밝혀낸 것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지구의 환경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영리기관이었다.
세계 1위 자동차 업체이면서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거대기업 폭스바(Volkswagen)은 사명(社名)이 독일어로 ‘국민 차’이지만 희대의 디젤 사기가 미국에서 적발됨으로써 이제 독일의 자랑에서 애물단지로 추락한 딱한 처지가 됐다. 이번 사태로 폭스바겐의 주가는 반 토막이 났고 그룹의 최고경영자가 교체되었으며 이 회사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지난 9월 18일 폭스바겐에 48만2000여 대의 디젤 차량을 리콜하라는 명령을 내린 데 이어 최대 180억 달러(약 21조240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할 방침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문제가 드러난 자동차를 구매한 미국 차주들이 집단소송을 내고 승소하면 폭스바겐이 물어주어야 할 돈이 얼마가 될지 모른다. 시애틀의 법무법인 헤이건스 베르만이 폭스바겐 차주들을 대표해 집단소송을 제기하는 등 집단소송이 이미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미국에 이어 전 세계 차주들이 들고 일어날 개연성도 충분하다. 여기에다 법률적 책임도 져야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법무부가 수사 방침을 밝혔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 스웨덴 체코 네덜란드 등 당국도 관련 조사에 나섰다.
독일의 애물단지로 추락
폭스바겐의 디젤차 배출가스(질소산화물) 측정 조작은 제조업 왕국 독일의 정교한 위장 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EPA와 캘리포니아 대기자원위원회(CARB) 관계자들은 최소 3년 전부터 “폭스바겐 차량들이 실험실에서 정지 테스트할 때와 실제 도로에서 주행할 때 배출가스 용량에 차이가 난다”며 의혹을 품었다. 그러던 중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국제청정교통위원회(ICCT)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의 대체연료·엔진·배출센터(CAFEE)에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CAFEE 연구원들은 폭스바겐의 파사트와 제타 등을 비롯한 여러 차종을 직접 몰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시애틀까지 1300마일(약 2092㎞)을 주행하며 배기가스 검출량을 검증했다. 그 결과 제타에서는 법적 제한치의 35배, 파사트에서는 20배가 넘는 질소산화물이 배출됐다. 이들은 실험 결과를 지난해 5월 EPA와 CARB에 보고했다. 이에 대해 폭스바겐 측은 “자체 실험 결과 경미한 소프트웨어(배출가스 저감장치) 오류가 발견됐으며 이는 리콜을 통해 금방 고칠 수 있다”고 해명했다. 그렇게 1년 넘게 버티다 지난 9월 초 EPA와 CARB가 폭스바겐의 2016년형 디젤차 모델에 대한 인증을 보류하며 압박하자 마침내 소프트웨어 조작 사실을 실토했다.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조작했는가. 폭스바겐은 해당 소프트웨어에 정교한 알고리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령들로 구성된 일련의 순서화된 절차)을 깔았다. 디젤 차량이 실험실 검사대에 올려져 구동되면 도로 주행 때 핸들 조작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바퀴만 돌아간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또 실험실에서는 도로에서와는 달리 트랙션 컨트롤(눈길, 빗길 따위의 미끄러지기 쉬운 노면에서 차량을 출발시키거나 가속할 때 과잉의 구동력이 발생하여 타이어가 공회전하지 않도록 차량의 구동력을 제어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데 주목했다. 이에 따라 실험 때 소프트웨어에 의해 이 두 가지 기능이 자동적으로 꺼지도록 함으로써 배출가스가 인위적으로 적어지게 했다.
이번 디젤 사기 적발에 관여한 기관은 EPA, CARB, ICCT, CAFEE다. 이 중에서 주역은 단연 2년 가까이 CAFEE를 움직여 과학적 사실을 밝힌 ICCT다. ICCT는 편향되지 않은 최상의 연구·기술·과학적 분석을 환경 규제당국에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독립적인 비영리기관이다. 이 기관의 사명은 공중보건을 이롭게 하고 기후변화를 완화하기 위하여 육상·해상·공중 운송의 환경적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 것이다. ICCT는 여러 공익재단으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는다. ICCT를 떠받치는 공익재단들 역시 비영리기관이다.
바퀴만 돌아가는 검사대
빈곤, 굶주림, 질병, 폭력, 공해, 무지(無知) 같은 인류 차원의 도전을 극복하겠다며 설립된 조직이 비영리기관의 주종을 이룬다. 세계적으로 이런 비영리기관이 1000만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180만 곳이 미국에 있다. 이런 비영리기관의 운영 자금은 전액 기부금으로 충당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가 세운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대표적이다. 빌 게이츠는 최근까지 이 재단 등을 통해 총 350억 달러(약 37조 원)를 기부했다. 20년 동안 매일 50억 원씩 인류 복지를 위해 써 왔다. 수십 년에 걸쳐 힘들게 사는 전 세계의 아이들을 돕고 있는 대표적인 비영리기관은 ‘세이브더칠드런’이다. 이 기관 산하의 공동체 보건 담당자 25만 명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마을과 마을, 집과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세이브더칠드런이 후원하는 마을과 아이에게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1995년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기관 ‘카붐’은 가난한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는 동네 운동장 건설 사업을 한다. 이 기관의 설립자는 워싱턴 D.C. 남동부에서 꼬마 2명이 방치된 자동차 안에서 놀다가 질식사했다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읽고 기관 설립을 결심했다. 카붐은 대기업, 중소기업, 교회, YMCA 같은 지역 집단, 공원관리국(公園管理局) 같은 지역 정부 기관, 자원봉사자들을 규합해 미국 곳곳에 운동장을 짓고 있다. 영국의 비영리기관 ‘아프리카교도소프로젝트(APP)’는 아프리카의 열악한 교도소 환경을 개선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APP는 우간다, 케냐,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에서 2만5000명이 넘는 재소자·교도관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12만 권 이상의 책을 보내 교도소 구내 도서실을 새로 만들고, 교도소 구내 진료소와 병원을 신축하거나 개축하여 병상 200개 이상을 확보하고, 매주 500명 이상의 재소자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과정 및 기타 교육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APP의 사업에 포함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명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끌어가는 수많은 비영리기관이 지구촌의 건강을 지탱하고 있다. ‘깨끗한 디젤’이라는 구호가 상업적 거짓말이었음을 밝힌 ICCT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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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