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만 모인 자리였기 때문일까. 지난달 말 강원도 의사회 정기총회에서 나온 장 회장의 발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치권에) 1년 쓸 수 있는 자금이 4억, 5억원 정도 된다”, “국회의원 3명한테 200만원씩 매달 600만원 쓰고 있다”, “한나라당 J의원이 연말정산 대체법안 만들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맨 입에 하느냐. 1,000만원을 현찰로 줬다”는 등 적나라한 증언들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
그는 또 보건복지부의 공무원과 골프를 친 뒤 거마비 명목으로 금품을 제공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의정회, MB지지”
의협은 장 회장의 발언에 대해 “크게 말실수를 한 것 같다”면서 “둘러대는 차원에서 부풀리거나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장의 확대를 경계하는 눈치다. 장 회장 본인도 “회장이 무능하다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실제 사실보다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상황은 이미 일파만파 커진 뒤였다.
의협은 한 해 예산이 7억여원에 이르는 의정회의 역할과 자금 사용처를 놓고 여전히 전전긍긍하고 있다. 의정회 자금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있고 의협 내부에서도 ‘카드깡’ 의혹이 일었던 만큼 장 회장 개인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가 실시될 예정이다.
장 회장이 일차적인 로비 대상으로 지목한 정치권은 펄펄 뛰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등 각 정당들은 브리핑을 통해 “허위 사실을 유포한 장 회장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예정에 없던 보건복지위를 소집해 장 회장을 불러 성토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은 “지난해 6월 친구인 의사를 만났더니 ‘회장님이 개인돈으로 후원을 하려 한다’며 봉투를 주려고 해 거절했다”면서 “이런 시도를 또 한 적이 없느냐”고 발끈했다.
하지만 지난 달 22일 서울에서 열린 대한의사협회 대의원 총회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이 의협의 손을 들어주는 등 의혹스런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당사자들은 “남의 잔치에 재 뿌릴 수 없지 않느냐”는 논리지만 정도를 벗어났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열린우리당 일각에선 이번 파문을 이명박 전시장과 연관짓기도 한다. 윤원호 최고위원은 “의정회가 이 전시장을 지지하는 부산 파워리더스클럽에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MB측 인사는 이에 대해 “근거도 없는 얘기”라고 일축하며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의료계, 로비 관행 팽배”
한편에선 이번 상황을 의료계 전반에 팽배한 로비 관행 때문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 제약회사 영업관계자는 이와 관련 “일부긴 하지만 제약회사와 의사들간의 그렇고 그런 관계는 널리 알려진 것 아니냐”면서 “가끔씩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의사들도 없지 않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보건복지위의 한 보좌진은 “이익단체와 관련된 후원금일수록 더 경계한다”면서도 “우리 상임위의 경우 병원 이용 등의 사소한 민원들이 많다. 이런 사안들과 관련, 의협 인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파문의 진원인 장 회장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이번 일로 무고한 정치권과 국회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데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다”며 “무엇보다 국민이 받았을 충격과 실망감 앞에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사죄했다. 의협을 비롯, 대한의학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관련 단체의 사과 성명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검찰이 압수수색 등을 통해 전방위 수사를 진행중이어서 이번 ‘의·정 커넥션’ 파문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커넥션 교두보 ‘의정회’ 실체
의협의 정치권 교두보 역할을 한 한국의정회는 의사협회 산하조직이다. 1970년 설립된 ‘대한의정회’가 전신으로 90년대 말 의약분업을 거치며
좀 더 명확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로 2001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꿨다.
37년의 역사를 가진 의정회는 협회 정관상 설립 근거가 없는 임의 단체로 의정회 회장은 의협 회장의 제청으로 시·도 의사회 회장단을 선출한다.
‘보건의료정책 및 대국민 홍보사업 등을 지원함으로써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한다’는 게 설립 목적이지만 의사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화가 실제 목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박희두 회장은 지난 봄 의학 전문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대선에서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지지하며 특정 후보에 ‘올인’했지만 의료계는 쓴맛을 봐야 했다”며 “이번에는 특정 인물에 대한 집중보다는 후보들의 성향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접촉을 시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의정회는 대선 후보별로 팀장을 두고 대선대책위원장을 추대할 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정회는 향후 각 당 대선후보와의 간담회, 토론회 등을 통해 협회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전달할 계획이며 내년 총선에서 자체 후보를 내겠다는 청사진도 그려 놓고 있다. 그러나 회장단 등 소수에 한정된 음성적인 정치 활동과 불투명한 회계 처리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도 논란이 적지 않
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동익 회장의 경우 의정회 회장 겸직 당시의 공금 횡령 문제로 이미 두 차례 검찰에 고발된 상황이다.
의협 회원들이 해마다 내는 60만원 정도의 협회비 안에는 의정회비 명목으로 4만~6만원 정도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해 집행하는 돈은 9억원에서 15억원 사이로 추정된다. 장 회장은 1년에 의정회가 쓸 수 있는 돈으로 4억원에서 5억원 사이를 언급한 바 있다.
의정회와 비슷한 성격의 단체로는 치과의사들의 ‘치정회’, 약사들의 ‘약정회’, 한의사들의 ‘한정회’ 등이 존재한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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