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아시아 안보를 ‘거래’로 파악해
한·일 배치된 미군 줄이면 치명적 재앙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버락 오바마 미국 제44·45대 대통령의 후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는 2016년 11월 8일에 실시된다. 아직 1년 1개월여 남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년 미국 대선은 공화당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간의 양자 대결이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젭 부시는 아버지와 형이 대통령을 지낸 정치 명문가 출신이고, 힐러리 클린턴은 대통령을 지낸 남편의 후광을 입고 있다. 이들 두 집안 간의 대결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미국 언론은 한때 2016년 대선을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이라고 불렀다. 젭 부시와 힐러리 클린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당선되더라도 결국은 ‘왕좌(대통령직)’를 물려받는 셈이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클린턴 대 부시' 가문의 대결로 예상되던 미국 대선 판세는 일찌감치 깨졌다. 공화당에서 이미 17명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대선판의 흥행을 이끄는 인물은 단연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다. 힐러리의 독주가 예상되던 민주당 경선도 이변이 일고 있다. 자칭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돌풍을 일으키더니 ‘공유경제' 개념의 창시자 로런스 레식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연방선거위원회에 출마 서류를 제출한 여야·무소속 후보는 30명에 육박한다.
힐러리 따돌리고 승승장구
여야를 막론하고 현재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후보는 ‘막말'과 ‘좌충우돌' 행보로 선거판을 뜨겁게 달구는 트럼프다. 트럼프는 ‘서베이유에스에이’의 최신 전국 여론조사(9월 2〜3일·1000명) 가상 양자대결에서 처음 클린턴을 45%대 40%로 눌렀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변수가 가로놓여 있지만, 만약 현재의 인기도가 그대로 굳어진다면 트럼프가 미국 제45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트럼프가 9월 9일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날 ‘티파티 패트리엇’ 등 보수단체 주최로 워싱턴 DC 미 연방의회 앞 서쪽 잔디광장에서 열린 이란 핵합의 반대 집회에 참석한 뒤 행사장을 빠져나가면서 그동안 한국 때리기 관련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나는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추가설명을 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을 좋아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진심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지난 7월과 8월 선거 유세 및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론했다. 그는 8월 21일 인터뷰에서 “남북한 간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전투함을 보낸다”며 “우리 군대를 (한국에) 보내고 그곳에 들어가 그들을 방어할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우리는 얻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서 7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유세에서 한국을 거론하면서 “미군이 수십억 달러를 버는 나라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미쳤다”고 말했다. ‘수십 억 달러를 버는 나라’라는 언급은 “사우디도 하루에 (원유를 팔아) 수십 억 달러를 버는데,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우리 군대가 해결한다. 그러고도 우리는 하나도 얻는 게 없다”라는 말에 이어 나온 것이다. 그가 이날 직접적으로 한국을 언급한 대목은 이렇다. “한국에 주한미군이 2만8000명 가 있는 걸 아느냐. 한국은 잘사는 나라다. 나는 한국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4000대가 넘는 TV도 (한국에) 주문했다. 삼성, LG…. 다 한국 회사다. 그런데 이렇게 잘사는 나라를 우리가 지키고 있다. 돈 한 푼 안 받는다. 미친 짓이다. 대통령이 중요하다. 나 같으면 담판을 짓겠다. 미국이 어떻게 세계 모든 나라를 다 지키냐.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일본… 다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특히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결의에 기대어 안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 때문에 두 가지 결과가 발생한다. 하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미국이 두 나라에 군사력을 전진배치하고 있어서 미국인들이 호구(虎口, sucker)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 동맹국이 자국 방위에 돈을 충분히 쓰지 않기 때문에 무역 불균형과 경제 성장에 있어 “우리의 점심밥을 (가로채) 먹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중상·거래주의 외교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외교정책을 따져가며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는다. 따라서 트럼프가 외교에 관한 소신 발언으로 선거전에서 손해를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을 후련하게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발언에 드러난 트럼프의 외교관(外交觀)에는 민족주의·중상주의(重商主義)·거래주의(去來主義)가 깔려 있다. 만에 하나 이런 생각을 가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아시아 정책을 결정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먼저 트럼프는 비용을 아낀다며 아시아 주둔 미군을 철수해 본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 이것은 전진배치의 전략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으로서 아시아에서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침해될 경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은 본토로부터 항공기나 선박으로 수송되어야 한다. 그 사이에 비상상황이 신속하게 전개되어 ‘기정사실’로 굳어진다면 국제사회는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미군이 전진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전진배치를 거두면 트럼프 행정부는 자진해서 확전억제(擴戰抑制)를 포기하게 된다. 확전억제가 작동하려면 전면 섬멸전이나 핵전쟁에 의존함이 없이 위기나 분쟁에서 적과 교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려면 아시아에의 전진배치가 필수적이다. 미국 본토에 주둔한 미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대규모 보복을 위협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비상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는 무책임한 수준으로까지 즉각 확대된다.
미국이 한국·일본과 맺고 있는 군사동맹의 수준을 재고할 수 있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한미·일미 동맹에 균열을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고 한·일 두 나라의 자체 군비 증강을 부추김으로써 동북아시아의 불안정한 균형을 뒤흔들 수 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안보결의가 약화될 경우 그 파급효과는 대만에까지 미쳐 중국의 대만 흡수결의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가 외교에 무지하다는 것은 각종 언론 대담을 통해 속속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심지어 공화당 내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여전히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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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