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서울 관악경찰서 신사파출소에 왜소한 체격의 이모(34)씨가 찾아와 자수했다. 피 묻은 점퍼차림으로 나타난 이씨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내연남을 살해했다. 복수가 끝났으니 죗값을 치루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이씨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가출한 친어머니 최모(55)씨와 친어머니의 내연남인 노모(52)씨를 흉기로 잇따라 살해한지 4시간만의 일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자신의 불행이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27년만의 모자간 만남이 부른 비극 내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그 내막을 추적해봤다.
이씨는 7살이 되던 해 어머니 최씨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저녁 무렵 깜빡 잠이 들었던 이씨의 옆에서 어머니가 내연남 노씨와 성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씨 아버지도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됐다. 갈등을 거듭하던 이씨 부모는 이혼하게 됐고, 어머니 최씨는 내연남과 서울로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 키워와
이씨에게 불행은 계속 찾아왔다. 재혼과 사업에 잇따라 실패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버지는 이씨의 눈앞에서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이때 이씨의 나이는 불과 12살이었다.
경찰조사에서 이씨는 “어머니의 불륜과 재혼실패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서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한 이후 나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까봐 두려워 이성교제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후 이씨는 2살 아래의 남동생과 부산에 있는 소년의 집에 맡겨졌다. 하지만 이씨는 좀처럼 소년의 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심지어 중학교 진학 이후 학교에서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등 학교폭력에 시달렸다. 결국 이씨는 17살이 되던 해 소년의 집에 동생을 남겨둔 채 가출했다.
가출 후 이씨는 가방 공장에서 숙식제공 조건으로 월 20만 원의 월급만 받으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왔다. 사회생활에도 적응을 하지 못한 이씨는 여러 공장을 떠돌았다.
항상 이씨의 머리 속에는 어머니의 불륜과 아버지의 자살 모습이 떠나질 않았고 ‘이 모든 불행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여성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어져 이씨는 여성을 기피하게 됐다.
이씨는 22살이 되던 해, 성년이 돼 소년의 집에서 나오게 된 남동생과 재회해 서울 신림동에 전세 500만 원 상당의 단칸방에서 같이 살게 됐다.
“내 아들 맞느냐”에 격분
이씨는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며 어머니와 어머니의 내연남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왔다. 자신의 삶이 고단해질수록 분노는 더 커져만 갔다.
지난 달 이씨는 건강보험공단에 피보험자부양 신청을 하기 위해 가족관계증명서를 발부받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주소를 찾아냈다. 이씨는 지난 7일 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서울 방화동의 영세민 임대아파트를 방문했으나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바로 다음날 오전 11시40분경 점퍼 안에 인터넷으로 구매한 흉기를 숨기고 다시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긴 세월이 흐른 탓에 어머니는 이씨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씨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무덤덤한 표정의 어머니는 “술 한잔 같이 하자”며 소주를 권했다. 이씨와 어머니는 4시간30분 동안 2병의 소주를 마시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내연남이었던 노씨와 결혼했다 이혼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1시50분경 노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의 전화통화에서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어머니 불륜으로 화제가 전환되자 분위기는 격앙됐다. 이씨는 어머니가 사과할 것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자신을 책망하자 실망한 나머지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어머니는 “내 아들이 맞느냐. 누가 보내서 왔느냐.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며 이씨를 밀쳤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하자 격분한 이씨는 점퍼 안에서 흉기를 꺼내 어머니의 복부를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어머니 내연남마저 살해
만취한 상태였던 이씨는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노씨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경기도 양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날 오후 6시37분께 양주 모 매운탕 집에서 노씨를 만난 이씨는 “노씨가 맞느냐. 나를 아느냐”고 말을 건 후 화장실로 유인했다. 이씨는 사과를 요구했음에도 노씨가 사과를 하지 않자 품 안에서 흉기를 꺼내 살인을 저질렀다.
경찰관계자는 “동생의 진술에 의하면 형이 그날 어머니를 만난 사실도 몰랐으며 전혀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불행했던 유아기와 청소년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흉기를 휘둘렀다”며 “날 따뜻하게 맞아줬더라면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피해자다”라고 말했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지난 9일 이씨에 대해 존속살해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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