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 시해범 이두황의 묘를 차길진 후암미래연구소 대표가 찾아냈다. 전주 기린봉에 터를 잡은 이두황의 묘는 2m가 넘는 비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었다. 그러나 묘비에 쓰인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들의 이름은 모두 고의적으로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다. 광복 직후 이완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친일파 묘는 파헤쳐져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을미사변 주역 중 한명인 이두황의 묘소의 위치는 그동안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앞서 1951년 당시 차 대표의 부친인 차일혁(빨치산 토벌대 18대대장)은 독립투사 김지강과 함께 이두황의 묘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두황 부관참시를 하지 못했다. 이두황의 시신은 당시로는 드물게 화장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부친에 이어 차 대표가 이두황 묘를 찾아내 3·1운동 92주년을 맞아 친일 매국노 이두황의 행적을 파헤쳐 볼 수 있게 됐다.
차 대표는 최근 흥선대원군이 그린 희귀본 ‘석파란(石坡蘭)’ 한 점과 이두황의 시문 족자 두 점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흥선대원군의 석파란에는 시중의 시화와는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꼿꼿하게 뻗은 난 아래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불로초가 그려져 있는 것.
대원군의 이름은 이하응이고 그의 호가 석파다. 일찍이 김정희도 석파의 난을 찬하여 “석파는 난에 조예가 깊으니 그 천기가 청묘하여 이에 이른 것”이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세간에는 ‘대원군란’ ‘석파란’이라 불리며 전해지는 그림이 많으나 불로초가 함께한 석파란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희귀작이다. 더욱이 석파란은 구한말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구한말 족자 석점의 출처는 일본 궁내청(宮內廳)이다. 대원군의 석파란은 이두황의 시문과 함께 궁내청에 보관돼 있었다. 불로초는 무병장수·만수무강을 뜻한다. 석파란은 ‘만수무강’하라는 의미로 불로초까지 그려 넣어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미우라 공관의 절친이자 후원자에게 선사한 흥선대원군 최대 걸작품이다. 이두황의 시화 두 점은 일본에 도망하여 고향땅을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이 구한말 족자 석 점은 작품성을 넘어 대원군과 이두황, 더 나아가 격동의 구한말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에 중추적 역할
이두황(1858~1916)은 서울의 가난한 상인 출신이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해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의 인생 전환점은 1894년 동학운동이었다. 동학운동 진압에 나선 그는 동학군과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승승장구한다.
특히 그는 1894년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동학농민군과 친일관군의 최대 격전지인 우금치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패퇴하는 동학군을 끝까지 추격했고, 퇴각하는 농민군을 향해 대학살을 감행했다. 동학농민군 진압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두황은 청군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에 파견돼 정찰수행과 정보제공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이두황은 명성황후 시해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일본은 민비 득세에 맞서 다시 대원군을 옹립하기 위해 획책한다. 명성황후세력은 1895년 7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협력하여 친일세력을 축출하고 그 대신 친러 세력을 등용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일본은 위축된 세력을 만회하는데 최대의 장애가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계획을 세운다. 해산위기에 직면한 훈련대를 이용하여 이들 사이에 발생한 쿠데타로 위장, 일본공사관 무관 구스노세(楠瀨幸彦)와 공모한 후에 대원군을 끌어 들이고 서울에 있던 일본인 낭인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명성황후를 시해한다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모의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계획의 주모자는 일본공사관의 마쓰무라(松村濾), 구스노세, 일본 낭인 오카모도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지도자로 하는 그룹과 이두황, 우범선, 이주회 등의 친일 군인들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당시 이두황의 역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이두황이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으로서 한 역할만은 추론이 가능하다. 이미 난자된 명성황후의 사체 뒤처리를 담당한 제2대대장 우범선과 같이 파면당한 사실만 보아도 얼마나 중책을 맡았는지 알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 후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는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하여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고등관 1등, 종 4위, 훈 3등 서보장 서훈
망명 생활 10여 년 동안 도쿄에서 활개 치며 주색잡기에 빠져 살던 이두황은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했다. 그는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가 되었고, 의병투쟁이 치열하던 전라북도의 관찰사 겸 재판소판사로 임명받았다.
온갖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렸던 이두황은 죽을 때에도 고등관 1등, 종4위, 훈3등 서보장도 서훈 받았다. 그의 시신은 친일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전라북도 장으로 장중히 엄수되었다. 그의 묘비는 같은 친일파인 김윤식이 짓고, 정병조가 썼다.
1951년, 차일혁 총경과 김지강은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이두황의 묘소를 찾았다. 그러나 시신은 없었다. 이두황은 불교식으로 다비하여 뼛가루를 묻었던 것이다. 생전에 부관참시를 예상했던 것일까. 운 좋게도 이두황은 시신의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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