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게임장 철문 안에서 반복되는 그들만의 세상

한국이 여전히 ‘도박 공화국’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허용된 경마, 경륜, 카지노 등의 사행산업은 물론 불법 게임장 역시 은폐된 곳에서 그들만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바다이야기로 대표되는 사행성 게임은 2007년 5월 도박 실태에 경종을 울리면서 불법화 됐지만 잠잠해 지기는커녕 업주들의 수법만 교묘해 졌다. 불법 게임장은 대도시 주택가 뿐 아니라 교외, 농촌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아직도 독버섯처럼 우리사회에 기생하고 있는 불법 게임장 업주들과 이용자들의 실상을 추적했다.
바다이야기 광풍이 최고조였던 2006년은 건물 하나 건너 사행성 게임장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수가 많았다. 한 때 1만5000개에 육박 하던 불법 게임장 개수는 그 전체적인 규모와 활동을 쉽사리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속 이후 오락실은 줄어들었고 한동안 오락실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오락실이 다시 세포분열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지방경찰청의 집중 단속은 불법 오락실이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 지역 한 달 동안 단속에 걸린 장소는 220곳, 처벌된 이들은 600여 명에 달했다.
도박규제 네트워크 관계자는 ‘동네 도박 시장’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게임의 희열을 맛 본 이들은 가까이서 돈을 불릴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데, 그 사실을 업주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업주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사회 곳곳에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이 선택한 장소는 과수원 창고, 공장, 당구장, 피시방, 교회, 호화 저택에서부터 상시 운행하는 국제 여객선까지 다양했다. 한 번 알려지기만 하면 고정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에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그리고 이용객들은 차창을 깜깜하게 개조한 승합차를 타고 비밀 장소로 가 게임을 한다. 게임장 내도 차단 유리 때문에 바깥을 보지 못하며 앞을 지나는 행인 역시 존재 여부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부 불법 게임장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돈을 잃은 이용객이 앙심을 품고서 고발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고를 하지 않는 불법 게임장은 믿을 만한 지인을 통해 소개된 이들만 고객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손님 등쳐먹는 업주들
불법 사행성 게임기의 특징은 확률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이용객들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게임을 통한 금전 손실이 카지노, 경마에 비해 크지 않아 재미삼아 시작하곤 하는데 업주들은 오히려 이런 맹점을 이용한다. 주된 수법으로는 터지는 확률을 높여 관심을 끌거나 직접 접근해 ‘특혜’를 주는 속임수가 있다. 단순한 방법이지만 현장에서 직접 보거나, 듣는 사람들은 ‘여기는 진짜 털리는 곳이다’ 믿으며 게임에 열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법에 당한 홍모씨의 제보를 통해 업주들이 이용객을 등치는 패턴을 살펴봤다.
홍씨가 드나들었던 불법 게임장은 강남구 역삼동 주택가 4층 건물 지하에 위치해 있었지만 지난달 7일 단속에 걸려 영업이 중단 됐다.
사행성 게임을 시작한 지 5년 정도 지난 홍씨는 6개월 가량 불법 게임장 출입을 끊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주임으로 일하던 차모씨에게 연락을 받고 다시 불법 게임장을 들렸다. 알고 지낸 차주임에게서 여러 번 연락이 오기도 했고 새로 옮긴 곳을 찾으면 잘 봐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홍씨는 그곳에서 사장 박모(여)씨와 차주임을 만난 후 이틀간 게임을 하지만 200만 원을 잃었다. 이틀이 지난 후에는 사장 박씨와 가게 금전을 관리하는 A(여)씨로부터 “만회시켜 주겠다. 벌써 14, 15, 37번 기계를 홍씨 앞으로 예약해 뒀다”는 얘기를 들었다. 잃은 돈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든 홍씨는 다시 도전했지만 결과적으로 300만 원의 돈만 잃는다.
당시 심정에 대해 홍씨는 “새벽 4시까지 혼자 남아서 게임을 했지만 돈만 잃어 상심이 컸다”고 말했다. 박씨는 환전해줄 돈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영업을 중지했고, 따지는 홍씨에 대해서는 돈을 얼마씩 모은 후 추후 연락 주겠다는 말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달 1일 사장으로부터 “이번에는 진짜 게임기 하나를 개조해 놨으니 믿어보라”는 말에 홍씨는 다시 한 번 게임장을 찾지만 추가로 100만 원을 더 잃었다.
홍씨는 “업주가 직접 특정 게임기를 거론하면 믿어보고 싶은 것이 이용객들 마음”이라며 “그렇게 될 줄 몰랐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업주 일당들을 원망했다.
홍씨는 박씨를 불법 환전 및 사기죄로 고소했고 수서경찰서는 박씨에 대한 수사를 착수했다.
돈줄 확보는 철저히
‘왜 본인이 타겟이 된 것 같으냐’ 질문에 홍씨는 “돈이 많아 보이면서 잃어도 별 내색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 같다”면서 “예전 내가 다른 게임장을 드나들었을 때도 주인이 나를 그렇게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행성 게임기가 금지된 후로 업주들 연락망은 더 촘촘해 졌는데 홍씨는 ‘이모’라고 부르는 중년 여성들을 예로 들었다. 홍씨에게 자주 연락하던 여성은 다들 ‘준이이모’라고 불렀는데 이들 ‘이모’는 서울에 7~8명 정도며 500~1000명 가량의 인원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씨는 이모들이 받는 일당은 하루 30만 원이라고 했다.
‘이모’들을 통해 불법 게임장이 영업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하는 홍씨는 “이들 역시 일반 이용객과 돈줄로 보이는 ‘큰 손님’을 철저히 나눈다”고 전했다. 기계를 몇 대 잃어도 별 말 없이 다시 오는 이들은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가까워지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많게는 하루 5번 씩 안부문자를 보내고, 연계돼 있는 다른 불법 게임장과 해당 인원의 연락처를 공유한다고 홍씨는 설명했다. 수 년 전부터 사행성 게임을 했던 이들 중 일부는 ‘어디에 새로 불법 게임장이 생겼다’는 것을 문자를 통해 알기도 한다.
홍씨는 이모들에게 “사행성 게임 시장이 예전만 못하더라도 서울에만 1000개의 불법 게임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어떤 오락실은 지인들 천국이며 알지 못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CCTV통해 사전 조치를 취한다”고 그는 전했다.
업주들은 검증된 손님들만 받는 방법 외에 또 하나 안전장치를 달아 놓는데 그것은 바지사장고용이다.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유명인 일수록 더 바지사장을 염두 하는데 홍씨는 자신을 속였던 박씨 역시 바지사장을 내세워 처벌을 모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홍씨는 박씨가 국민가수 조모씨의 전처면서 국회의원의 딸로서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이라고 했다. 불법 게임장이 경찰의 단속에 걸리자 박씨는 종적을 감추고 카운터를 봤던 60대 이모씨를 사장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압수된 기기는 다시 업주 손으로
불법 게임장 업주들이 바지사장을 내세우는 경우는 지난 16일 적발된 사건에서도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은 종로, 중구 등지에서 불법 게임장을 운영하던 업주들을 구속했다. 업주들은 단속에 대비해 바지사장을 고용했는데, 고용된 바지사장들은 일당 15만 원을 받으면서 대기 했고 조사를 받으면 200~300만 원을 추가로 지급 받았다.
업주들은 전과가 없는 바지사장들이지만 혹시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구속된다면 추가 댓가를 지불함은 물론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업주 6명은 지난해 6~12월까지 푸른바다, 젤리피쉬, 바다이야기로 불리는 사행성 게임기를 돌리면서 6억7000만 원의 수익을 냈다.
이들은 해머로도 깰 수 없는 문을 안정장치로 해 놓았지만 빈 상가들이 많은 종로, 중구에 위치해 있는 바람에 덜미를 잡혔다.
검찰 관계자는 “이동 인구가 많은 종로, 중구 내의 빈 상가들은 업주들에게 매력적인 장소일 수밖에 없다”면서 적발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에선 압수한 기기를 다시 되 팔아온 사건이 적발됐다. 지난달 27일 경찰 압수물 보관창고를 운영하는 전직 경찰관 전모씨는 종업원 4명과 함께 2009년부터 최근까지 불법오락기 1700여 대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시중에 유통시키다 적발됐다.
압수물품은 한국환경공단 산하 전국 39개 압수물사업소나 일선 자치단체 구청 등에 위탁해 보관한 뒤 폐기처분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압수물 보관절차가 복잡하고 창고까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민간업체를 선호, 이 같은 일이 빚어졌다.
앞서 업주에 속아 돈을 잃었던 홍씨는 몇 년 전 불법 게임장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던 때에 발을 담갔던 이들이 아직도 주요 이용객이라고 말했다. 주위에 사행성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본인이 하고 싶어도’ 어디서 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데 기존 이용객들은 주변 지인들을 통해 다시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행성 게임기 등록제가 도박 천국을 만든 이후 정부는 뒤늦게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불법 오락실은 음지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해 놓았다.
지난 16일 서울지방경찰청이 발표한 ‘2010 서울시내 불법 게임장’ 단속 건수는 3894건으로 입건된 피의자는 5614명에 달했다.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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