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재계에 만연한 세태를 풍자한 말로 퍼진 ‘피 보다 진한 돈’, ‘돈 앞에 무너진 형제간 우애’다. 최근 롯데그룹 형제간 대결에서 더욱 대중의 수긍을 얻었다.
유수의 재벌 중 형제간 다툼이 없던 기업이 없었을 정도로 민망한 모습을 연출했다. 재계에 과연 ‘의 좋은 오너 형제’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일요서울]은 형제간 우애가 두터운 기업을 찾아봤다.
장·차남 그룹 경영권 나눠 가져…역할 분담 ‘눈길’
창업주가 직접 챙겨…형제의 난 막으려는 포석
큰 싸움 없이 형제가 공평히 경쟁하는 일부 대기업 가문의 모습은 최근까지 형제 간 싸움으로 명성에 먹칠한 기업과 대조적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한국타이어다.
한국타이어의 지분은 조양래 회장이 10.50%, 조현식, 조현범 형제가 각각 0.65%, 2.07%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주사격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가 25%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경우 조 회장이 23.59%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조현식 사장이 19.32%, 조현범 사장이 19.31%를 갖고 있다.
그간 장남(사장 조현식)이 지주사를, 차남(사장 조현범)이 주력 타이어 계열사를 각각 도맡아 책임지는 형국이었는데 앞으로는 기존 구도를 유지하면서 일부 역할을 서로 맞교대 하는 식으로 분담하게 된다.
경영권 분쟁…남의 일
두 형제는 함께 지주사의 전략·기획 업무를 함께 총괄하며 그룹 신성장 동력을 찾는 동시에 계열사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일선 경영 실무 전반도 맡게 된다. 두 형제 모두 지주사와 주력 계열사에서 핵심 역할을 두루 맡게 된 것이다.
삼성 오너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병석이 길어지면서 후계구도로 인한 논란이 불거질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삼남매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최근 합병이 마무리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통합 법인에 올라섰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공식 직함은 아직 없다. 다만 통합 삼성물산이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로 위상을 공식화한 만큼 그룹의 대표자로서 이 부회장이 총괄적인 지휘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통합 삼성물산이 그룹 신수종 영역인 바이오사업의 대주주(지분 51.2%)로서 바이오·헬스부문을 미래 신 성장동력으로 중점 육성한다는 전략이어서 이 부회장의 역할론에 관심이 모아진다.
동생 이부진 사장은 현재 호텔신라 대표직과 함께 2010년부터 삼성물산 상사부문 경영고문 직함을 갖고 있다.
이 사장은 통합 삼성물산에서도 고문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장은 현대산업개발과 협업한 HDC신라면세점이 최근 신규면세점 사업자로 선정됨에 따라 당분간 면세점 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제일모직 패션부문 경영기획 담당인 이서현 사장은 통합 삼성물산에서 패션이라는 주요 사업영역을 맡아 실질적으로 실적을 올려야 하는 위치에 있다.
미국 파슨스디자인학교 출신인 이 사장은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부터 시작해 10년 넘게 패션부문에서 기획과 경영전략을 맡아왔다.
통합 삼성물산은 패션부문에서 합병의 시너지 효과로 상사부문의 해외영업 인프라를 활용하겠다는 전략을 설정했다. 뉴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2014년 매출 1조9000억 원에서 2020년 10조원으로 5배 이상 성장을 목표로 잡았다.
재계에서는 삼성 오너가 삼남매의 계열 분리는 당분간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호사가들은 “남매끼리도 큰 불화 없이 잘 지내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분쟁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전망한다.
주력사 OCI 주식은 이수영 회장이 10.92%, 차남 이복영 회장이 5.49%, 3남 이화영 회장이 5.43%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여자 형제들과 3세들은 각각 0.5%에 못 미치는 지분을 가지고 있다.
송암문화재단(1.23%) 등을 포함해 오너 일가가 보유한 OCI 지분은 총 30.13%다. 다른 자회사는 오너 일가가 지분을 보유하는 대신 OCI를 통해 지배한다.
이복영 회장은 삼광글라스(22.4%)의 최대 주주이며, 이화영 회장은 유니드(17.3%), OCI상사(25.06%)의 대주주다. 2세대의 독립경영 노선에 따라 3세 경영 체제도 구체화됐다.
이수영 OCI그룹 회장의 장남 이우현씨는 OCI 사장을 맡아 OCI그룹의 핵심인 태양광과 화학소재 분야를 이끌어 갈 계획이다.
차남인 우정씨는 OCI 계열의 태양광전지 재료인 잉곳과 웨이퍼 제조업체 넥솔론을 설립해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 넥솔론은 태양광에너지 업황이 나빠지면서 2014년 법정관리에 돌입했으며 오너 일가가 보유하던 지분은 거의 소각됐다.
이복영 삼광글라스 회장의 자녀들도 2011년 신재생에너지 소재업체인 쿼츠테크 지분을 매입하며 3세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이화영 유니드 회장은 외아들 우일씨와 함께 유니드의 지배회사인 OCI상사의 최대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이화영 회장 부자는 OCI상사 지분의 100%를 보유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2세대에서 형제 경영을 하던 OCI그룹이 3세대에는 계열 분리를 통한 독자 노선 체제를 갖출 것으로 보고 있다.
LG가도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겸 KBO 총재,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4형제가 경영 일선에서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LG가는 유교적 가풍을 유지하는 가문인데 현재도 동생들은 맏형의 권위를 세워주고 맏형은 동생들과 싸우지 않으며 잘 어울리면서 지낸다.
형과 함께 LG 내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구본준 부회장은 주력 계열사를 키우는 본인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다. 방계기업인 희성그룹을 이끄는 구본능 회장-구본식 부회장 형제도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활발히 활동할 뿐 형의 그림자를 밟는 일은 보기 어렵다.
이외에도 SK와 신세계, 부영, 동국제강, 영풍 등의 재벌그룹에선 혈연 간 경영 분쟁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재벌닷컴과 재계 등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 자산 기준 40대 재벌그룹에서 지금까지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곳은 모두 17곳이었다. 재벌 2곳 중 1곳 가까이는 혈족 간에 재산이나 경영권 다툼을 벌인 셈이다.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등의 국내 재벌 들은 경영 승계 과정에서 온갖 내홍으로 얼룩졌다.
이들 기업들은 자수성가한 창업주의 창업정신에 흠집을 내는가 하면 형제 간 서로 정통성과 실적을 언급하며 계열 쪼개기로 갈라서는 불운을 맞아야 했다.
사회 안팎으로 피로감과 환멸감을 느낀 대중들의 따가운 시선은 물론 관련 부처의 지적으로 회사 업무 및 매출에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