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내걸었던 ‘대기업 지배주주,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를 제한하겠다’는 대선공약이 무색해졌다. 8.15광복 70주년을 맞이해 경제인 14명에 대한 특별사면 및 복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사면의 명분을 ‘법치주의 원칙 속 국민통합·경기회복 방점’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번 특별사면이 국민적 합의를 거쳐 이뤄졌던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특별사면을 통해 국민들이 화합하는 양상이 나타났을까. 이 점에 대해서 각계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특별사면 대부분은 오히려 반국민 정서에 부합했다”며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면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과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됐던 특별사면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는 살아났을까. 전문가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민적 공감대에 맞춰 제한적 행사한 것”…朴대통령 의지 반영
‘최태원 사면-구본상 제외’ 6527명 특사, 경제인은 14명뿐
새정치연합은 13일 광복 70주년 특별사면에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최태원 SK 회장 등 경제인 14명이 포함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유은혜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대기업 지배주주, 경영자의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사면권 행사를 엄격하게 제한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며 이같이 불만을 제기했다.
따라서 이번 사면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과 크게 배치된다는 비판이다.
유 대변인은 또 이번 사면대상에 건설사가 포함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 3월 1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성장을 위한 토양을 마련한다는 각오로 부패 척결에 범정부적 역량을 결집하겠다고 해놓고 이번 사면에는 경제인을 포함해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공정거래를 위반한 건설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 대변인은 “입찰 담합, 횡령, 배임, 분식회계 등은 공정한 시장 경제 확립에 위배된다”며 “사회 투명성에 대한 신뢰를 저하하고, 비정상의 정상화와도 거리가 멀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오늘 사면이 정부 국책 사업으로 발생한 국민적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지 못한 사면이 된 점에 대해서도 아울러 유감을 표명한다”고 덧붙였다.
여당과 재계, 청와대 일각에서도 이번 사면을 두고 “차라리 안 하는게 낫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기업 중대 범죄에 대해 사면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겠다는 대선 공약은 공약대로 못 지키면서 ‘기업인 사기 진작을 통한 경제 살리기’라는 목적도 놓치게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사면 발표 직전까지 사면은 하되 복권은 안 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더욱 커졌다. 일례로 최태원 회장의 경우 사면이 돼 옥살이에서 자유로워졌다 해도 복권이 안 되면 등기이사 복귀가 늦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현 정부가 원하는 경제살리기 동참이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사면과 복권을 함께 하는 것을 두고 관계부처가 진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사면 원칙 엄격 적용 vs 기업인 사면 ‘엿 바꿔먹기’ 여론
“고뇌에 찬 결단” vs “공약 배치”…여야, 엇갈린 사면 평가
재계가 재벌 총수들의 사면을 촉구하면서 기업들이 경기활성화와 청년일자리 창출 등 투자를 확대하려면 오너의 과감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재계의 한 원로는 “국민을 내세운 엿바꿔먹기식 사면이 이뤄졌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라며 “사면은 하고 복권은 안 하면 총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 따라서 현 정부 정책을 위한 복권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달 전인 7월 13일 처음 사면 얘기를 수면 위로 올린 때만 해도 ‘경제활성화’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스스로 2012년 대선 당시 대기업 오너가 저지른 중대 범죄는 사면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약한 것이 거론되면서 원칙론도 제기됐다.
여기에 올초 정치권을 들썩하게 했던 ‘노무현 정권의 성완종 비리사면’ 논란과 최근 ‘롯데 사태로 촉발된 재벌개혁 움직임’도 기업인 사면 축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긍정 vs 비판’
각계 반응 엇갈려
시민단체들도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다.
‘참여연대’는 “부패 기업인에 대한 사면 폭이 줄기는 했지만 최태원 SK 회장 등 일부 기업인에 대한 특별사면은 국민통합과 경제 정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또 “특별사면 때마다 기업인 사면을 두고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권력형 범죄자나 부패 기업인에 대한 사면을 제한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바른사회시민회의’는 논란이 됐던 경제인 사면과 관련해 “형 집행이 부족한 사람이나 현 정부가 출범한 뒤 비리로 연루된 사람은 포함되지 않았다며 원칙이 지켜진 사면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가진 국민의 뜻을 반영한 결과로 특별사면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절제된 사면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명확한 기준과 원칙에 따라 민생사면과 경제인사면을 실시했다”고 자부했다.
실제로도 경제인에 대한 사면은 소규모에 그쳤다. 정치인은 0명이다.
재계 총수 가운데 사면 대상에 포함된 이는 최태원 SK 그룹 회장뿐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구본상 전 LIG 넥스원 부회장 등 사면 대상으로 거론된 재벌가(家) 인사는 모두 대상에서 제외됐다.
김승연 회장의 경우, 이미 1995년과 2008년 두 차례 사면을 받은 전력이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김 회장은 2014년 2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번에 사면과 복권이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김 회장은 5년간의 집행유예 종료 후 2년 뒤인 2021년 2월까지도 계열사의 등기임원이 될 수 없다.
수감 중인 LIG그룹의 구본상·구본엽 형제는 1800억 원대의 사기성 기업어음(CP) 발행 등으로 개인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혔음에 비춰 국민정서를 고려해 사면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기대보다 규모가 줄긴 했지만 재계는 정부가 경제인 사면을 단행한 것에 대해 반기는 기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논평을 내고 “대통령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경제인들에 대한 특별사면과 특별복권이라는 용단을 내린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계는 이를 경제 살리기와 국민통합에 경제계가 앞장서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대한상공회의도 이날 논평을 통해 “이번 사면을 계기로 대한민국 경제의 재도약과 상생협력을 통한 국민대통합이 촉진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상의는 이어 “기업들은 지난 70년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높아진 경제적 지위만큼 사회적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반성하고, 경제인 사면의 뜻을 살려 선진적 기업문화를 뿌리깊게 정착시켜 모범적인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행정제재·특사
적용 범위는
한편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갖고 6527명에 대한 특별사면 계획안을 발표했다.
특별사면·감형·복권된 형사범 6422명은 대부분 초범 또는 과실범이었다. 불우수형자 105명도 특별사면·감형 조치를 받게 됐다.
70세 이상 고령자 중 강력사범 등을 제외한 모범 수형자가 혜택을 받는다. 아울러 모범수 588명이 가석방, 모범 소년원생 62명이 임시퇴원 조치, 서민 생계형 보호관찰대상자 3650명이 보호관찰 임시해제 조치를 받게 됐다.
운전면허 취소·정지·벌점, 건설분야 입찰제한, 소프트웨어 업체 입찰제한 등 행정제재자 총 220만6924명에 대한 대규모 특별감면 조치도 이뤄졌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인한 벌점을 받은 204만9469명의 벌점이 일괄 삭제되고 6만7006명의 면허 정지·취소처분 집행철회 잔여기간도 면제됐다.
건설분야에서는 영업정지 등으로 입찰참가가 제한된 2200개 건설사의 행정제재가 사라진다. 영세 운송사업자와 자가용으로 불법 운송업을 한 43명에 대한 처분도 면제됐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