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맞제? 니가 짐꾼 태호 맞제?”
김태호 최고위원이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10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됐을 때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했다는 말이다.
김 최고위원은 YS의 오른팔이었던 고(故) 김동영 전 의원에게 정치를 배웠다. 당시 YS가 이끌던 민주산악회가 산행을 할 때면 막내 격인 그가 짐을 도맡아 들다시피 했고, 그 모습이 YS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김 최고위원은 1962년 경남 거창 시골마을에서 김규성씨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스스로를 ‘촌놈’ ‘소장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소를 여러 마리 키우면서 때가 되면 우시장에 내다 팔고, 송아지를 사와 다시 키워서 팔았다. ‘중농(中農)’은 됐던 셈이다.
그는 거창농고와 서울대 농대 농업교육과를 졸업했다. 서울로 유학 온 그는 부친의 고향친구인 김동영 전 의원의 집에서 ‘입주과외’를 하며 정치를 곁눈질로 배웠다. 그러다 경남에 지역구를 둔 이강두 의원의 보좌관이 되면서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36세에 경남도의원이 됐고, 2002년 기초단체장으로선 최연소인 40세에 거창군수가 된다. 2004년에는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 도전해 당선됐다. 당시 최연소 민선 광역단체장이었으며,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3선 도전을 포기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찾아가 “더 큰 정치를 해보고 싶다”며 미리 불출마 의사를 알렸다고 한다. 이 때 그를 눈여겨본 이 전 대통령이 40대의 그를 국무총리로 지명하게 된다.
그는 2014년 10월 느닷없이 최고위원직 사퇴를 선언했다가 슬그머니 철회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총선 불출마 선언도 ‘돌발 행동’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부산·경남지역의 한 언론인은 “김태호는 ‘버리면 버릴수록 얻는 것이 많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도의원, 군수, 도지사, 총리 후보자가 되는 과정에서도 계속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 때문에 성공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번 불출마 선언도 차기 대권가도의 우회로를 선택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김태호’ 하면 ‘친화력’을 빼놓을 수 없다. 정치권에선 그를 ‘마당발’로 부른다. 전국에 퍼진 인맥이 광범위해 자주 인사를 하는 아버님만 1000명, 형님은 800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국회 안에서도 이런 저런 인연을 갖다대어 여러 개의 모임을 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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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