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경제에 민족주의 색채 가미되며 ‘공동번영’ 무색
통합모델인 유럽연합, 그리스 위기 거치며 정체성 훼손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지구촌의 평화와 발전을 지탱하는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질서에 갈수록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게 스며들면서 공동번영이라는 인류의 이상이 흔들리고 있다. 유럽에서 남북·동서 간 갈등이 불거지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국은 아예 ‘옛 영광’을 외치기 시작했고, 일본도 안보법제의 중의원 통과를 계기로 민족주의 대열에 동참할 기세다. 그런가 하면 세계경제와 무역을 규율하는 지구 차원의 협약이나 체제는 점차 무색해지고 있으며, 각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격적인 통화 정책을 서슴없이 쓰고 있다.
정치통합이라는 최종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경제통합의 중요 단계인 화폐통합을 이룬 유럽연합(EU)은 최근 그리스 부채 위기를 겪으면서 정체성을 새삼 되돌아봐야 할 정도로 회원국들 사이에서 만만찮은 민족주의의 분출을 목격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여진이 우크라니아에서 산발적인 내전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소 회원국들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공포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기운이 부쩍 높아졌다.
공격적인 통화 정책 앞다퉈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은 최근 그리스 좌파 정부가 국제 채권단의 긴축 요구를 받아들일지 여부를 놓고 실시한 국민투표를 지지했다. 극우가 좌파를 지지한 것은 FN이 국민투표를 통한 프랑스의 EU 탈퇴를 원하기 때문이다. FN은 이민 반대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EU를 주장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근년 들어 극우ㆍ극좌의 민족주의 세력이 부쩍 확산 중이다. 올해에만도 극우 성향의 덴마크국민당 우파연합이 지난 6월 총선에서 승리해 좌파연정을 무너뜨렸고, 4월에는 핀란드 극우정당이 총선을 통해 연정에 참여했다. 이미 주요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은 FN은 물론, 올해 말 총선이 예정된 포르투갈 등 남유럽에서는 극좌 바람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최근 그리스 위기를 묘사한 유럽 신문의 만평에서 빙산 꼭대기에 올라앉은 그리스 밑으로 빙산의 가라앉은 부분으로 묘사되었던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세 나라도 그리스와 비슷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국제 채권단에 대한 민족주의적 분노로 변질돼 가고 있다.
지난 5월 영국 총선에서 단독으로 정부를 꾸릴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 의석을 확보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틈만 나면 영국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스코틀랜드 주민들의 민족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가까스로 막아낸 캐머런은 자국에 유리하게, 즉 못사는 EU 회원국 사람들이 영국으로 과도하게 이민 오는 것을 제한할 수 있도록 EU협약을 개정하자고 EU측에 요구한 상태다. 캐머런은 협상결과를 바탕으로 2017년 말까지 EU잔류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가난한 EU 국가 주민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반감 역시 민족주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 각국에서 두드러지는 민족주의 기운은, 국경을 넘나드는 투자, 이민, 여행, 통신 등 한때 ‘하나의 세계’를 약속했던 통합의 힘이 지금은 오히려 세계를 더 분열시키는 ‘증오의 씨앗’으로 역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민대국 미국에서 아직 이렇다 할 민족주의 정서가 불거지지 않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이러한 지구촌의 민족주의 대두에 대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제레미 샤피로 연구위원은 《허핑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세계화의 폐해가 민족 정체성을 훨씬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며 2차대전 이래 인류가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구조를 모색한 끝에 이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현대 인류의 삶에서 민족주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으며 이는 유럽과 여타 지역에서 완연하다고 지적했다. '하나의 세계'나 '유럽의 통일'은 이상일 뿐이고 전 세계적인 자본 흐름은 다국적 기업을 더 탐욕스럽게 만들고, 부유하지 못한 국가에서의 복지나 연금 지출은 '긴축'을 불러오면서 '국가주의'의 원인이 됐다고 《허핑턴포스트》는 분석했다.
저성장 덫에 빠진 세계경제
저성장의 덫에 빠진 세계 경제도 민족주의로 치닫는 징후가 완연하다. 세계 각국은 내수 부양과 수출 확대를 위해 양적완화에 나서면서 자국 통화의 약세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통화 약세는 수출 제품의 가격의 경쟁력을 높여 매출 확대에 도움이 되지만 상대국의 수출을 갉아먹는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근린궁핍화 정책이라고 부른다. 환율 전쟁은 올해 들어 더욱 가열돼 한국 등 30여 개국이 기준금리를 내리거나 국채 매입 등의 양적완화를 실시했다.
기업 간 문제인 인수합병(M&A)에도 경제 논리 말고도 민족주의 등 다른 요인이 작용한다. 최근 중국의 칭화유니그룹(紫光集團)이 세계 3위 반도체 기업인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인수에 나서자 시장에서는 이에 중국 지도부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규모가 작은 중국의 반도체 기업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인수를 추진한다는 것은 반도체의 해외 의존을 탈피하려는 정부의 시책에 부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의회는 군사, 에너지 등 안보에 관련되는 M&A에 제동을 거는 전통이 있다. 2005년 미 의회는 중국 국영 석유 업체인 중국해양석유(CNOOC)가 미국 정유회사 유노칼을 인수하려는 것을 저지한 바 있다.
M&A와 관련해 국가 이익을 중시하는 움직임은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저지하려다 실패한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삼성물산은 국내 주요 신문에 합병 찬성을 호소하는 광고를 내고 “한국 대표기업으로서 기업가치와 주주이익의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국민정서에 호소했다. 블룸버그는 주총을 하루 앞둔 지난 7월 16일 “엘리엇의 폴 싱어 회장은 한국 투자자들이 애국심이 얼마나 투철한지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127년 역사의 세계적인 경제일간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일본 미디어회사 닛케이에 8억4400만 파운드(약1조5000억원)에 최근 매각된 것도 영국인들 사이에서 민족 자존심 논란을 부를 전망이다. 영국 주요 언론은 이를 놀라운 일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인수자가 일본 기업이라는 데 더 경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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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