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주역 박영진씨 결혼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주역 박영진씨 결혼
  • 최은서 기자
  • 입력 2010-11-16 09:37
  • 승인 2010.11.16 09:37
  • 호수 864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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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룸살롱 살인사건’으로 20년을 복역한 박영진(50)씨가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한 성당에서 동료 조직원 누나인 장모(53)씨와 웨딩마치를 올렸다. 늦깎이 결혼을 하게 된 박씨의 얼굴은 가슴에 단 꽃만큼이나 환했다. 하지만 손꼽아 오던 순간인 만큼 긴장이 역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하객의 대부분은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어깨들’이었지만 장소가 성당이었던 만큼 결혼식 내내 엄숙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결혼을 통해 제 2막의 인생을 시작한 박씨는 혼례를 집전한 신부 편으로 전달한 편지를 통해 가슴 벅찬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10일 오후 2시, 결혼식 시간은 3시임에도 성당 본관 1층은 검은 양복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성당 앞 주차 공간은 물론 진입로까지 검은 승용차로 빼곡히 채워졌다. 고급 세단들이 성당 인접 도로로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성당 인접 도로에서는 차량혼잡으로 도로진입을 막고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성당은 1000여 명에 가까운 인파로 검은색 일색이었다.


예상보다 적은 ‘어깨’ 하객들

사실 이번 결혼식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현역 보스들은 물론 주먹계 원로들까지 운집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예상했던 바 보다는 하객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지난달 20일, 김태촌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A씨의 결혼식과는 달리 화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결혼을 축하하는 김태촌의 서양난 화분이 전부였다.

한 소식통에 의하면 소란이 일어나거나 충돌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경찰이 출동했고, 이 소식을 접한 ‘어깨’들이 불참하거나 눈도장만 찍고 갔다고 한다.

박씨의 결혼식은 성당 본관 2층에서 치러졌다. 본관 내부 양 끝 쪽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검은 양복’들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연신 웃는 얼굴로 하객들을 반기는 신랑의 밝은 모습과는 달리 시종일관 날을 세운 모습으로 묵묵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초로의 신사들은 3~4명의 수행원과 함께 다니며 ‘아우’들의 인사를 받았다. 하객으로 이 결혼식에 온 ‘어깨들’은 서로를 ‘형님’‘아우’라고 칭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 바쁜 모습이었다.


그리움이 사랑의 결실 되길 기도

결혼식은 박씨 부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0분 지연됐다. 박씨의 결혼을 축복하는 성가대의 노래를 시작으로 결혼식이 시작됐다.

“내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소원이 이뤄졌다”고 소감을 밝힌 박씨는 감격에 어린 표정으로 입장했다.

하객으로 참석한 ‘어깨들’의 대부분은 자리에 앉지 않고 뒤에 선채로 결혼을 지켜봤고, 가족과 지인들은 앞자리에 앉아 박씨의 빛나는 순간을 함께했다.

혼례를 집전한 신부는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이라며 “부부는 하늘의 뜻으로 맺어지는 것으로 하느님이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랑 신부가 ‘결혼 청사진’에 대해 편지로 써서 보냈다며 편지 내용을 소개했다. “만나지 못할 때 가슴이 저리는 그리움이 생겼고 그 그리움이 사랑의 결실이 되기를 기도했고 그 기도와 기다림이 오늘의 축복어린 자리로 이어졌다.”(신랑)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 마음을 열게 됐다. 남편이 내 편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동안 내조를 열심히 했으니 공주님처럼 대해주길 바란다.”(신부)


옥중 편지로 싹튼 사랑

사실 박씨에겐 결혼은 상상도 하지 못할 ‘사치’나 다름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수감생활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몰고 왔던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이 박씨였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은 1986년 8월 1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서진룸살롱에서 두 조직폭력배 간의 폭행시비가 번져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조직원 출소 축하연을 벌이던 맘보파는 서울목포파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서울목포파 조직원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와 생선회칼에 맘보파 조직원 4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서울목포파 조직원으로 26세였던 박씨는 동료조직원과 함께 사건 이틀 후 자수했다. 박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 상고심에서 20년형이 확정됐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조차 논고에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잔혹한 사건이었다.

박씨는 20년형으로 복역하던 중 서진룸살롱 사건에 가담했던 동생의 옥바라지를 하던 장씨를 알게 됐다. 박씨는 혼례 중 편지를 통해서도 “친구를 누이로 알게 됐는데 1년에 한두 번 만나던 사이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편지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점점 사랑이 싹텄다”고 전했다. 이처럼 박씨와 장씨는 편지를 통해 사랑을 키워왔고 수감생활 중 카톨릭 신앙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 되어줬다.

박씨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던 은인의 권유로 성당에서 결혼을 올리게 됐다. 지난 2006년 출소한 박씨는 기계제조업체 직원으로 일하며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사진=맹철영 기자] photo@dailypot.co.kr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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