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2명 자살에도 범행은 계속됐다
기업형 슈퍼마켓(SSM)과의 경쟁에서 밀려 자금난 위기에 처한 마트 운영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일당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3일 S(48)씨 등 3명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공범 14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의 마수에 걸려 운영권을 억울하게 빼앗긴 마트 운영자 중 2명은 채권 압박을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도권을 무대로 마트 사냥에 나선 이들의 범행을 추적해 봤다. 2008년 6월, 무등록 대부업자인 S씨는 기업형 슈퍼마켓인 SSM으로 동네 슈퍼마켓이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를 듣고 머리가 번뜩였다. 범행 방법에 골몰하던 S씨는 자금난 해결을 미끼로 마트 운영권을 가로채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실행에 나섰다.
S씨의 주도하에 범행에 가담한 사람만 모두 16명에 달했다. 이렇게 꾸려진 마트 전문사기단은 자금책, 물색책, 해결사, 돈을 받고 명의만 빌려주는 바지사장 등으로 세세하게 역할을 분담했다.
여기에는 조폭인 전주타워파 행동대원 L씨도 나섰다. 바지사장에는 가끔 일용직 노동일을 하며 끼니를 해결하던 노숙자들을 포섭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Y(49)씨 등 7명의 노숙자들은 ‘명의만 빌려주고 바지사장 역할을 하면 고시원 방 제공은 물론 한 달에 150~200만 원을 고정적으로 주겠다’는 S씨 일당의 말에 두말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처음 약속과는 달리 명의 도용 대가 비용은 소액으로 나뉘어 지급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작전을 짠 이들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경영난에 처한 마트업주들은 “매매계약만 체결하면 빚을 떠안아 주겠다”는 S씨의 달콤한 제안에 하나같이 속아 넘어갔다. S씨는 이와 더불어 공동운영을 제안했다. 마트 계약 체결 시 공동사업자 명의 방식을 이용하면 건물주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들 일당은 약간의 계약금만 지불한 뒤 운영권을 넘겨받고선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해 마트 내의 물건과 시설물들을 헐값에 이른바 ‘땡처리’로 팔아넘긴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S씨 일당은 2008년 6월부터 지난 1월 사이 수도권 마트 운영자 6명을 상대로 총 15억5000여만 원 상당의 물건과 운영권을 빼앗아 왔다.
동네마트 철저하게 벗겨먹기
2008년 6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N마트를 운영하던 H(28)씨는 좌불안석이었다. 친척 형으로부터 마트를 인수받은 후 오픈하기 위해 S씨에게 3000만 원을 빌려 쓴 것이 그만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급전이 필요했던 H씨에게 S씨는 “돈 3000만 원을 바로 빌려 주겠다”며 “앞으로 빌릴 돈까지 합산해 총 8000만 원을 빌려준 것으로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받자”는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이벤트에다 인테리어 등으로 마트 새 단장 준비에 급했던 H씨는 S씨의 검은 속내는 모르고 이 제안에 덥석 응했다. 달리 돈 빌릴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었다. “돈을 갚지 못할 수도 있으니 형식적으로 마트 매매계약서도 작성해 달라”는 말에도 ‘설마 다른 일이 있겠는가’라고 자위하며 ‘마트 매매계약은 1억 원에 체결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도 작성해 공증을 받았다.
마트 오픈의 꿈에 부풀었던 H씨는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생각했다. 의욕에 넘쳐있었던 터라 3000만 원쯤은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하지는 기대는 빗나갔다. 마트가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 재산을 털어넣어 개업했던 탓에 매출이 저조하자 S씨의 돈을 갚을 수 있는 여유자금이 마련되지 않았다.
두 달이 넘도록 S씨의 돈을 갚지 못하고 사정을 이야기 하며 차일피일 미루자 S씨는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14일 S씨는 바지사장인 K(40)씨를 내세워 공동사업자로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요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S씨는 “지분율 98%를 넘기라”며 협박하기 시작한 것. 돈을 갚지 못한 H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스란히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가게를 바지사장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H씨는 자신이 가진 지분율 2%로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명목뿐인 공동사업자였던 셈. 3000만 원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H씨는 결국 지분율이 넘어 간지 이틀만인 2008년 8월 16일 새벽에 마트 2층 복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H씨의 비극적인 선택에도 이들의 파렴치한 행각은 계속됐다. H씨가 자살한 날에도 이들은 H씨와 작성한 마트 공증서류를 근거로 법원에 압류 신청을 했다. 결국 고스란히 S씨가 마트를 손아귀에 쥐게 됐고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마트 물건들을 ‘땡처리’해 현금화 시킨 후 폐업 처리했다.
죽음으로 몰고 간 ‘흡혈귀’들
이들 일당의 사기행각에 충격과 실의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H씨 뿐 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한 N마트가 불행히도 자금난에 처한 마트들을 물색하는 물색책인 K(40)씨의 눈에 띄었다. K씨는 N마트 점장인 P(39)씨에게 “채무를 모두 안고 가는 조건으로 3억5000만 원에 마트를 인수 하겠다”며 접근했다. 이때도 역시 이들 일당은 바지사장을 내세웠다.
마트 운영을 위해서 계속해서 물건을 매입했다. 특히 유제품, 청과, 정육 등은 매일 매일 마트에 들여놔야하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이들 일당은 거래처에서 물품을 가져오면 외상 서류의 서명을 한사코 하지 않았다. 이에 이들을 대신해 P씨가 외상 서류에 사인을 해 왔다.
물건이 마트에 들어와 구색이 갖춰졌지만 팔리지도 않은 물품이 자꾸 없어져 갔다. 물건은 매일매일 들어오는데 마트는 텅텅 비어갔다. 사태를 지켜보다 ‘사기 당했다’는 생각이 P씨의 머리를 스쳤다.
더 이상 이들 일당이 마구잡이로 물건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가게를 지켰다. 새벽에 잠도 자지 않고 가게 밖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잠복했던 것. 하지만 물건 빼돌리기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과적으로 마트 내 물건들은 물론 시설물까지 통째로 이들 일당이 다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K씨 등은 빼돌린 물품을 기존 가격에서 30~50%로 할인된 가격으로 ‘땡처리’해 마트를 거덜낸 것으로 드러났다.
K씨가 공동사업자 제도를 악용하고, ‘바지사장’을 통해 사업자명을 수차례 변경해 내세우는 바람에 채무자들은 점장에게 채무해결을 독촉했다. 형사고소가 물밀듯 들어오고 1억 원이 넘는 채무에 집도 압류 당하자 P씨는 극도의 심리적 압박을 느꼈다. 결국 공황상태에 빠진 P씨는 자택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 일당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한 목소리로 “공황상태다. 나도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물품 외상대금, 매장 보증금, 관리비까지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게 됐다. 이들 일당에게 항의도 해봤지만 조직폭력을 앞세워 협박한 탓에 항의의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전 재산을 잃는 등 막대한 재산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이혼 등으로 가정이 파탄돼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이들 일당은 전주 타워파 행동대원인 L씨를 내세워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1~2달 간격으로 사업자명을 다른 바지사장을 내세우는 방법 등으로 바꿔와 법에도 호소할 수 없었다.
공범 K씨의 제보로 범행 들통
이들의 인면수심의 범죄는 공범인 K씨가 경찰에 제보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K씨는 ‘땡처리’ 역할을 담당했다. S씨는 K씨에게 “1억 원 어치 마트 물건을 구해오면 현금 5000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K씨가 부도위기에 직면한 마트로부터 8500만 원 상당의 물품을 가져 오자 S씨 일당의 태도가 돌변했다. 물건만 받고 대금은 주지 않고 버틴 것이다. 이에 격분한 K씨는 상습사기 혐의로 수배상태임에도 경찰에 S씨 일당 마트 사기 수법을 제보했다.
이같은 제보 사실을 알게 된 S씨 일당은 지난 6월 말 조폭인 L씨를 앞세워 K씨를 붙잡아 결박한 후 밤 12시쯤 북한강변 저수지로 끌고 갔다.
L씨는 그동안 조직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해 왔던 탓에 이번에도 전면에 나섰다. L씨는 K씨를 폭행하며 “저수지에 빠뜨려 죽이겠다” “병신을 만들어 버리겠다”며 협박했다. 이와 함께 “광역수사대에 허위 진술 했다고 진술을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이 같은 폭행과 협박에 분노를 느낀 K씨는 곧장 경찰에 다시 찾아가 일부만 진술했던 범행 일체를 전부 다 털어놓았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에게 피해를 입은 마트는 200~300평 규모의 중형마트다. 정상적인 영업을 위해서는 하루에 매출이 1000만 원 정도가 이뤄져야 하나 피해를 입은 6개 마트는 200~300만 원 정도의 매출규모로 자금난에 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 따르면 조직폭력배인 L씨가 개입되긴 했으나 전주타워파는 이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S씨 일당이 피해자들이 고소를 해도 개별적으로 고소하면 개인 간의 민사문제로 변질되어 피의자를 처벌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을 악용했다”며 “죄질이 몹시 나쁘다”고 전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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