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비웃듯 지명수배 18년, 불법 출·입국 75회
이쯤 되면 영화 ‘캐치미이프유캔’도 무색할 지경이다. 사기죄로 지명수배 중이면서도 일본인 사업가 행세를 하는 것도 모자라 위명(僞名)여권으로 수십 차례나 불법 출·입국하던 50대 남자가 경찰에 검거됐다. 경찰청 외사국은 최모(54)씨를 지난달 28일 체포하고 여권 위반 등의 혐의로 지난달 30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2004년부터 75회나 불법 출·입국했지만 단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명수배를 당했으면서도 20여 년 간 한 번도 경찰에 붙잡히지 않아 그의 신출귀몰함에 경찰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 경찰의 눈을 피해 감쪽같이 도피생활을 한 최씨의 지난 행적을 추적해 봤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1992년 4월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총 5000만 원의 빚을 지게 됐다. 부도 직후 채무자들이 앞 다퉈 회사로 몰려들었고 채무자 중 한 명이 700만 원을 사기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해 최씨는 사기죄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5000 만원의 부채는 물론 700만 원도 갚을만한 능력이 없었던 최씨는 구속이 두려워 일본행을 결심했다.
최씨는 고소당한 직후 미련 없이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90일 단기 비자로 무작정 일본에 건너갔다. 하지만 곧 비자 만료일이 도래했고, 결국은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뚜렷한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유흥업소 잡일, 접시닦이, 공사장 일용직, 각종 배달 등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떳떳치 못한 불법체류자 신분인 탓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생활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최씨는 지난 2004년 야쿠자 야마구치구미 하부 조직에 속한 야쿠자에게 300만 엔(한화 3000만 원)을 건네고 일본인 노숙인 N씨의 위명여권을 얻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최씨가 그동안 일했던 유흥업소 관계자를 통해 야쿠자로 보이는 사람을 소개받아 위명여권을 발급받았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야쿠자 통해 위명여권 만들어
위명여권은 위조여권의 일종으로 발급 단계에서 타인의 신상정보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넣은 여권이다. 다시 말해 최씨 위명 여권은 노숙자 N씨의 이름과 생년월일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넣은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위명 여권은 외형상 합법적이라 적발이 어려워 범행 시 자신의 신분을 감쪽같이 속이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12여 년 간 일본에 발이 묶인 채 불법체류자로 전전긍긍하던 최씨는 이 위명여권으로 일본인 N씨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최씨는 위명여권을 발급 받은 뒤 일본인으로 위장해 지난 6년 여 간 한국, 일본, 중국, 호주, 칠레 등을 75차례나 오갔다. 또한 주로 한국에 머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일본인 사업가로 행세해 왔다.
최씨는 경찰조사에서 “사업차 해외를 자주 다녔으며 그동안 중개상과 로비사업을 해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관계자는 “최씨가 자신이 사업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업의 내용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 일본인 사업가 행세를 하며 사기행위를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씨가 그동안 75차례나 불법 출·입국을 했음에도 출입국 과정에 적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권 상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입국 시 지문확인시스템을 거치지 않아 출입국 관리 망을 유유히 피해간 것이다.
실제 여권 주인 구속되며 덜미
하지만 무엇이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지난 2008년 8월 여권의 주인인 노숙인 N씨가 자동판매기를 털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N씨를 수사하던 일본 경찰은 N씨의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N씨의 구속 기간인 2008년 8월부터 2009년 12월 사이 일본을 드나들었던 기록을 적발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경찰은 여권 위조 조직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다 요코하마에 있는 한국클럽을 수색해 일본 야쿠자 조직원과 한국인이 범행에 연루된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 경찰은 입출국 기록을 통해 최씨가 지난 6월 한국으로 출국한 사실을 확인, 한국 경찰에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경찰은 출입국 기록을 통해 경기 일산에 위치한 30대 내연녀의 빌라에 머물고 있던 최씨를 체포, 최씨의 도피생활은 마침표를 찍었다.
최씨는 N씨로 살았던 탓에 한국에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질 수 없기에, 2004년 이후 내연녀와 3여 년 간 사귀며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내연녀의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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