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 총선 공천 위협 느낀 세력들 합작 움직임
유승민- 김한길 관계 각별…손학규 영입설도 무성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이종교배’(異種交配)는 다른 종의 생물을 교배시키는 것이다. 정치에서도 간혹 이종교배가 일어난다. 노선과 이념이 다른 정파가 정권창출을 목표로 연합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90년의 3당 통합이 최초였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총재(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JP)의 신민주공화당이 전격 합당했다.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은 YS가 오랫동안 투쟁대상으로 삼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 세력이 뿌리였다.
1997년 대통령선거 때는 DJP 연합이 성사됐다. 민주당 김대중 총재(DJ)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JP와 손을 잡았다. 호남과 충청의 결합이기도 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진보계열의 노무현 후보와 보수성향의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를 했다.
이종교배는 모두 성공한 결과를 낳았다. 3당 통합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YS를 후보로 내세운 19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DJP 연합도 DJ가 대통령, JP가 국무총리를 맡는 공동정권을 만들었다. 노무현-정몽준 연대는 선거일 전날 깨지긴 했지만 선거 판세를 뒤흔들어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문재인-안철수 합작은 실패
반면, 정치권에서 ‘동종교배’(同種交配)는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2012년 대선에서 같은 진보성향인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어정쩡한 단일화를 했지만 정권탈환에 실패했다.
이런 헌정사를 볼 때 내년 4월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지금 정치권에서 추진되는 이종교배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여권에서 친박계와 비박계, 야권에서 친노계와 비노계의 충돌이 본격화된 시점에 비박과 비노가 제3지대에서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태세를 보여 성사 여부에 비상한 관심이 쏠린다.
여당인 새누리당에선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축출되는 과정에서 친박계와 비박계가 정면충돌했다. 결국 차기 총선 공천권 싸움이었던 이번 파동에서 유 전 원내대표가 친박계의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사퇴하자 비박계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는 친박계가 ‘K-Y 라인’(김무성 대표-유승민 원내대표)에 의해 공천학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휩싸였으나 유승민 파동을 거치면서 정반대가 됐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선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노계의 당 장악이 노골화 되면서 비박계가 공포심에 떨고 있다. 김상곤 위원장의 혁심위원회가 잇달아 내놓은 혁신 방안들도 문재인 대표체제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비노계는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설(說)만 무성했던 야권 신당론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동병상련일까. 신당 창당의 여러 시나리오 중에는 여야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함께 모여 제3의 중도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야당 발(發) 중도신당 창당론은 호남신당 한계론에서 시작됐다. 새정치연합 박지원·박주선, 무소속 천정배 의원 등 호남 출신이 구상하던 신당은 지역정당이란 비판을 받았다. 이에 천 의원은 전국 규모의 중도신당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때 맞춰 새누리당에서 유승민 의원이 사실상 축출당하면서 공천 학살 위기에 빠진 비박계가 술렁이고 있다.
양당의 중심세력에서 밀려난 비박계와 비노계가 합작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신호탄은 새정치연합 당직자 출신 등 당원 50여명이 쏘아 올렸다. ‘국민희망시대’(대표 정진우 전 서울시의원)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온 이들은 9일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 모임 멤버 중에는 손학규 전 대표, 정대철 상임고문, 박주선·천정배 의원 등과 가까운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정대철 상임고문과 박주선 의원은 8일 저녁 박지원 의원과 가까운 박준영 전 전남지사, 박광태 전 광주시장, 정균환 전 의원 등과 회동했다. 이들은 중도우파까지 포괄하는 신당을 만들어야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천정배 의원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전국 250개 선거구 모두에 후보를 내는 신당 창당을 목표로 뛰고 있다고 한다. 특히 천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확고한 개혁 의지가 있다면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과도 함께 할 수 있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천 의원은 새정치연합을 탈당해 4·29 재보선에 출마했다가 패배한 정동영 전 의원도 끌어들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야권에선 이런 움직임과 관련해 김한길·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김부겸 전 의원도 주목한다. 김한길 의원은 지난 2013년 5월 민주당 당대표 경선 무렵 고(故)성완종 전 경남기업회장으로부터 3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김 의원은 이를 야당 끼워 넣기라고 강력 반발하고 있다. 정치적 위기를 맞은 처지에서 모종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 의원은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함께 하는 중도개혁주의 정당’을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합리적 보수’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염두에 둔 구상이다. 김 의원과 유 전 원내대표는 소속 정당이 다르지만 서로 호흡이 잘 맞는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공동으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유 원내대표는 세미나에서 “진영의 포로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상황에서 이 발언을 읽으면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논리를 떠나 뜻이 맞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정치를 같이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2012년 대선후보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문재인 대표와의 사이에 앙금이 쌓인 안철수 전 대표도 야권 발 정계개편에서 한 축을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 안 전 대표는 호남 중심의 신당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유승민 전 원내대표 같은 신(新)보수를 지향하는 세력이 합류하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 그는 원래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를 지향하던 인물이다.
김부겸 전 의원은 보수의 본류인 대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대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간판은 큰 부담이다. 따라서 제3의 중도정당이 만들어진다면 김 전 의원으로선 부담스러운 짐을 벗어던지고 선거에서 소속 정당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소속으로 정치를 한 적도 있다.
YS 차남 김현철씨도 동조
당 밖의 정치성향 인물들도 비박-비노 연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다가 돌아선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비박계와 비노계가 어우러진 중도개혁주의 정당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교수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비박계와 비노계의) 연대나 제3당이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YS의 차남 김현철씨도 분당론에 동조했다. 현철씨는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괜히 피곤하게 굴지 말고 박근혜 세력은 탈당해 ‘도로 민정당’으로 가고, 비박 세력은 ‘신YS 세력’으로 뭉치고, 비노 세력은 ‘신DJ 세력'으로 재편해 친노 세력과 갈라서면 된다”고 주장했다. 또 “그래서 결국 내년 총선이 신4당 체제가 되면 총선 구도가 신 87년 체제로 회귀하면서 대선 구도의 변화도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현철씨의 말이 현실화 되면 정치권에 신YS 세력(비박)과 신DJ 세력(비노)이 1차로 별도의 정당을 만들게 되고, 2차로 연합을 하는 구도가 가능하다. 이 경우 수십년 동안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오랜 숙적이었던 YS와 DJ의 정치후계자들이 뭉치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비박과 비노가 합작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정치권의 의견은 엇갈린다. 지금까지 이종교배가 성공한 건 YS와 DJ, JP 같은 걸출한 인물이 깃발을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만큼 대중성을 갖춘 인물을 찾기 어렵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한 여론조사에서 여권 대선주자 선호도 2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거부권 정국에 따른 ‘반짝 효과’로 봐야 한다. 김한길 전 대표의 리더십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 않다. 안철수 전 대표도 ‘새 정치의 기수’ 이미지가 상당부분 퇴색했다.
이 때문에 전남 강진 토담집에서 ‘셀프 유배’ 중인 손학규 전 대표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비박-친노 연합을 가정했을 때 중앙에서 깃발을 드는 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는 까닭이다. 손 전 대표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출신이면서 민주당(현 새정치연합) 대표를 지냈다. 현 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손 전 대표는 친노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대신 비노와는 만남이 잦았다. 이종걸 원내대표와 박영선 전 원내대표, 그리고 김부겸 전 의원이 최근 손 전 대표와 만났다. 만일 비노계가 집단 탈당해 비박계와의 연대를 조건으로 영입을 제안한다면 그에겐 정계복귀의 명분이 생길 수 있다.
여권 비박, 여권 비노의 합작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다음은 황태순 정치평론가의 관측이다.
“비박과 비노의 결합, 다시 말해서 양 극단을 배제한 온건중도 통합정당의 출현은 우리나라 정치지형의 지평을 넓히고 국민들의 선택 폭을 확대하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다만 현실적으로 양 극단의 구심력이 원체 강해서 중력을 끊고 중도지역에 함께 모일 수 있느냐가 문제다. 김한길 전 대표의 입장에서는 이번 유승민 사태가 그저 고마울 것이다. 당장 현실화가 어렵다고는 하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 무엇인가 양극단을 피한 새롭고 부드러운, 그래서 부담 없는 정당 출현의 가능성에 대해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ilyo@ilyoseoul.co.kr
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