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이후 여당과 청와대 간 갈등이 정치권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국내 경제를 얼어붙게 한 메르스 파문도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안도 ‘거부권 정국’에 막혀 국민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정치권은 온통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할 것인지 말 것인지’부터 ‘대통령이 꺼내들 다음 카드는 무엇인지’, ‘여당이 친박 비박으로 쪼개질 것인지’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 유 원내대표와 함께 당청 갈등의 3각축을 형성하고 있는 김무성 대표의 행보는 대권 주자로서 위상과 대표로서 역할에 비해 크게 도드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 대표는 유 원내대표와 함께 비박의 대표주자이지만 당청 간 혈투가 벌어지고 있어도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당내 조정자로서 선거때마다 선 굵은 정치를 선보인 김 대표지만 이번만은 예외다. 무대(무성 대장)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2인자 처세술과 YS식 ‘치고 빠지기’…
- 정당보스 이미지 탈피…책임있는 지도자 시험대

‘오락가락’, ‘치고 빠지기’? 중재자 딜레마
그러나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유승민 원내대표 한 명 책임지우려고 대통령이 발언을 길게 한 게 아니다”면서 “당이 박 대통령의 상황인식을 안이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고 김 대표까지 겨냥한 듯 발언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에 6월30일 김 대표는 유 원내대표 자진사퇴 입장에서 선회해 ‘유 원내대표의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해 유승민 옹호론쪽으로 기울어졌다.
또한 유 원내대표의 거취관련 의원총회를 통해 결정할 일이라고 밝혔다가 비박계가 주류인 의총 결정에 반대하는 청와대와 친박계의 반발로 다시 ‘의원총회 개최 반대’로 바꾸면서 비박계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김 대표의 이런 오락가락 행보에 대해 당직에 있는 비박계 한 인사는 “김 대표가 당청 간 중재자로서 나서 청와대와 당의 입장을 다 듣다 보니 생긴 혼선”이라며 “청와대 이병기 대통령 실장부터 서청원 최고에 유 원내대표까지 입장을 챙기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정치적 의미를 차단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치고빠지기식’ 행보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년 10월16일 상하이발 개헌발언과 마찬가지로 개헌 논의의 필요성을 주창하다가 청와대가 불쾌함을 표시하자 바로 “대통령께 죄송하다. 내 불찰이다”며 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일단락됐다. 또한 당 대표 고유권한인 여의도 연구소 소장 임명을 두고도 박세일 전 의원을 임명하려다 친박계가 반발하고 나서자 청와대가 낙점한 김종석 전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임명했다.
또한 당 대표 몫인 지명직 최고위원도 1년이 다 돼가도록 공석으로 남겨둔 것도 청와대와 친박의 반발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김 대표는 부산 출신으로 작년 7월 전당대회 이후 여권 대권 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정당의 보스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다. 또한 당내 조정자로서 야당과의 타협을 이끄는 협상력, 그리고 당 장악 능력면에서는 동료 의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2%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대’라는 별명이 정계에 입문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한 게 그 반증이다.
‘2인자’ 정치인생 알려준 YS식 정치실험
특히 김 대표의 ‘2인자 정치’에 대해 지인들은 한결같이 YS 정치문하생으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1980년대 중반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에 가담해 YS정권 청와대의 민정비서관을 시작으로 김 대표는 ‘2인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꿰고 있다.
현재권력’(대통령)과 맞서는 ‘2인자’는 무의미하며 결코 차기가 될 수 없음을 ‘이회창 케이스’로 통해 배웠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19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패배가 단순히 DJP 연합 때문이 아니라 YS와의 갈등이 결정적이었음을 김 대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당시 YS는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론’을 통해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고 이 후보는 500만표를 얻어 이회창 후보의 대선 패배에 치명타를 입혔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 대표는 여당 대선후보군중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친박내 ‘반기문 카드’ 모색이나 자신의 딸 대학교수 임용 특혜 시비가 우연이라고 보지 않는 배경이다. 김 대표를 오랫동안 보아온 지인들 역시 김 대표의 ‘YS와 판박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다수의 지인들은 “김 대표와 얘기해보면 YS랑 정치하면서 신념처럼 갖고 있는 게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맞서서는 안된다는 것”이라며 “김 대표가 보기에 똑똑하고 훌륭한 이회창 총재가 왜 대통령이 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고개를 쳐들어서 못됐다고 신앙처럼 각인돼 있다”고 말한다.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 버튼을 누르자 곧장, “대통령께서 어렵고 고뇌에 찬 결정을 하신 것을 당이 절대 존중한다”며 좀 민망스럽기까지 한 발언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또한 지난 4.29재보궐 선거 당시 김 대표가 자당 후보에게 당선될 경우 당직을 약속한 것 역시 YS 정치와 판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치러지는 지역구 4곳의 당 소속 출마자들에게 당이나 국회 요직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과거 YS 전매특허였다. 실제로 1988년 4월 총선에서 YS의 통일민주당이 DJ의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2 야당으로 추락했을 때 YS가 “돈은 못 줘도 당직은 약속한다”며 측근들을 붙잡은 사례는 여전히 정치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유승민 거취 두고 무대 리더십 시험대 올라
김 대표와 YS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YS가 정권을 잡고 나서 김 대표는 청와대 민정.사정 비서관을 거쳐 40대 초반의 나이에 내무부 차관에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김 대표는 당시 YS의 차남 현철씨와도 가깝게 지냈다. 김 대표는 오랜 의정활동에도 불구하고 책을 출간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쓴 책이 1987년 ‘왜 김영삼이어야 하는가’(한림문화원)라는 책을 쓴 게 유일하다.
이처럼 김 대표의 YS 정치에 대한 신앙심도 이제 심판대에 오른 형국이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유승민 대표를 끌어안고 갈 것인지’ 아니면 ‘버리고 갈 것인지’를 확실하게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당청 갈등 및 여야 대치 상황속에 중재자로서 역할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여권의 차기 지도자로서 ‘2인자’ 생활을 청산할 것인지 김 대표는 기로에 서 있다.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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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공격나선 YS 차남 김현철과 무대 ‘인연’
- YS 문하생 김무성 ‘눈치’보고 아들은 ‘공격’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국민대 정치대학원 특임교수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정면충돌양상을 보이는 것과 관련해 맹공을 퍼부었다. 김씨는 지난 6월2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제 본색을 확실히 드러내시는구먼. 민주주의하자니 얼마나 거추장스러웠겠어? 과거처럼 확 밀어버리고 싶은데 세상은 녹록지 않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무능과 무책임 딱지는 넘 기분 나쁘고"라는 글을 게재하며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어 "만만한 게 당이라고 마구 찍어 눌러버리려 하지만 과연 그게 그리 만만할까?"라고 반문했다. 또 김 교수는 “이젠 대놓고 당청이 대로에서 드잡이를 해대니 닭쌈이 이럴까?”라며 “자신들의 무덤을 스스로 더욱 깊이 파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김씨의 이 같은 발언은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비박(비박근혜)계 의원들을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YS 정권 시절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 교수가 박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보내자 ‘YS 문하생’인 김무성 대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때 김 교수와도 친분이 깊었던 김 대표다. 김 교수도 지난 1987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김무성 의원의 주선으로 취직을 하기도 했고, 김 의원은 지난 1993년 YS가 집권하자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당시 YS와 현철 씨가 첫 조각 작업을 진행한 걸 고려할 때, 현철 씨의 지원이 없었다면 '젊은김무성 대표가 민정비서관에 임명되긴 어려웠을 거라는 게 상도동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문민정부 시절 현철 씨는 '소통령'으로 불리며 아버지 YS와는 동지적 관계로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게 공통된 평가다. 또 김 의원은 현재의 안전행정부인 내무부 차관으로 영전한 뒤 부산에 출마, 1996년 여의도에 입성할 정도로 그 후광을 톡톡히 입었다.
그런 두 사람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7년 2월 한보 청문회에 김 교수가 출석할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결국 한보 등으로부터 66억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고, YS는 그 이후로 '식물 대통령'이 되다시피 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서먹한 관계로 지내다가 본격적으로 멀어지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3월 김무성 의원이 새누리당 탈당을 접고 백의종군을 선언할 때다.
김 의원은 지난 2012년 3월 새누리당 공천에 탈락할 당시만 해도 김덕룡 전 의원, 김현철 씨와 함께 탈당해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대항하려 했다. 비록 '도원결의'는 하지 않았다지만, 나중에 김 의원은 결국 "우파 정권 재창출을 위해 탈당하지 않고 당에 남아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김 의원의 당 잔류와 백의종군 선언으로 최병국 당시 의원 등 새누리당 낙천자들의 연쇄 탈당도 막을 내렸고, 공천 파문은 잠잠해졌다. 김 의원이 당 분열을 막은 셈이었다. 당시 여권 내에서는 김 교수가 그 이후 사석에서 ‘김무성 의원이 배신을 때렸다’고 비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현 정부 탄생과 집권 이후에도 박 대통령과 관련한 사안마다 찬반으로 맞서면서 YS마저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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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