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비때마다 ‘신당론’으로 앞장서 갈등 조장
호남에 DJ 정신 실종…당 화합 주문 잇따라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고문(顧問)’들이 당을 ‘고문(拷問)’하고 있다.”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소장파 당직자 A씨는 “풍부한 경험을 가진 당의 원로들이 계파싸움을 일삼는 분파주의자들을 준엄하게 꾸짖기는커녕 앞장서서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푸념했다.
실제로 야당 원로들은 4·29 재보선 참패 이후 문재인 대표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당이 쪼개질 위기에 처했음에도 화합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분당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훈수정치’를 하고 있다.
정대철·김상현·이용희 상임고문과 5선 의원을 지낸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의 6월 29일 ‘4인 원로 회동’이 대표적이다.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저녁 모임을 가진 이들은 새정치연합을 분당시켜 신당을 만드는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했다고 한다. 당초 권노갑 상임고문도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때문인지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4인 원로 회동에선 친노패권 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이 이어졌다고 한다.
특히 문 대표 체제로는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추기 어렵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야권의 질서를 새로 짜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목되는 부분은 원로 회동 참석자 4명 가운데 3명의 아들이 야당 정치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5선 의원을 지낸 정대철 상임고문은 정호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부친이다. 선친인 정일형 박사까지 3대가 서울 중구에서만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가문이다. 6선 의원 출신인 김상현 상임고문의 아들은 김영호 서대문구을 지역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19대 총선 때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바 있다. 이용희 상임고문의 아들은 이재한 충북 보은-옥천-영동 지역위원장이다. 이재한 위원장도 지난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父子 야당정치인들 주목
문재인 대표체제에 가장 비판적인 인물은 정대철 상임고문이다. 정 고문은 6월 19일 천정배 의원, 신중식·문학진·이철 전 의원과 ‘냉면 회동’을 갖고 신당 창당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4·29 광주 서구을 보궐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당선된 천 의원은 신당창당론의 ‘키 맨’이다.
정 고문은 문 대표와 이종걸 원내총무가 사무총장 인선을 놓고 갈등을 빚자 한 방송에 출연해 “당신(문 대표)의 의지대로 하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놀음이라는 것은 사람 간의 큰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이 크게 없는 분으로, 또 방향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또 신당추진 움직임과 관련해선 “신당이 호남에서 만들어지면 박주선 의원, 이철·염동연·홍기훈 전 의원이 할 모양이다. 10월에 광주 동구청장 선거가 있는데 그게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다른 원로들도 각자 목소리를 내면서 당의 분열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교동계 좌장격인 권노갑 상임고문은 “정당정치 관행은 주류 60%, 비주류 40% 배합이었다. 문 대표도 이 정신을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또 김한길 상임고문은 ‘창조적 파괴’라는 말로 자신이 공동대표까지 지낸 새정치민주연합 해체를 시사하고 있다. 그는 문 대표가 책임론에 휩싸이자 측근들에게 “창조적 파괴 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고문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이 소환을 통보했지만 버티고 있다.
당의 원로격인 박지원 의원도 계속 신당 창당의 불씨를 살려 나가고 있다. 그는 7월 2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천정배 의원 등이) 호남 신당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신당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당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앞서 “야당에는 문재인 외에도 여러 대안이 있다” “신당 창당 추진그룹이 3~4개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고문들은 대부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제자들이다.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온갖 핍박과 탄압 속에서 DJ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산파로서의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에서의 홀대와 배제에 첫 번째 설움을 당했고, 2012년 친노 세력들이 다시 당에 들어와 당권을 장악한 후 두 번째 설움을 당했다.
지난 2·8 전당대회를 통해 친노들은 문재인 대표를 앞세워 또다시 당권을 거머쥐었다. 문재인 체제 출범 이후 지금까지 진행돼온 상황을 보면 세 번째 설움을 당할 것이라는 트라우마가 작동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측면도 있다. 초·재선 의원들이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가운데 결집력이 막강한 친노들에 의해 속속 격파되는 현실 속에서 훈수라도 두면서 DJ의 흔적을 지키겠다는 고문들의 충정일 수도 있다.
초·재선 의원들 각자도생
하지만 정치 환경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이들 고문들이 청장년으로서 한창 활동할 때 가졌던 패기와 야성, 그리고 영향력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국민의 정부 5년을 거치면서 이들도 이미 기득권 세력으로 변모했고, 이제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그룹이 됐다. 때문에 그들의 훈수는 절박하고 진정성 있는 권유가 아니라 귀찮고 자신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후배에게 강요하는 듯한 잔소리로 들리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원로들이 당을 흔드는 ‘훈수정치’를 이어가자 실제로 현역 의원들이 그에 따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정배·박주선 의원은 틈만 생기면 신당론을 언급한다. 호남권의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다른 지역의 비노계 의원들이 동조하면서 당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6월 30일 열린 ‘8인 중진 회동’은 원로들의 정치훈수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모임처럼 비쳤다.
박지원 의원과 이종걸 원내대표, 강창일·김동철·김영환·신학용·주승용·최원식 의원 등 비주류 중진 8인은 이날 회동에서 신당 창당 문제를 논의했다. 현역 의원들이 집단으로 모여 신당론을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자리에서 광주의 3선인 김동철 의원은 “당 혁신이 제대로 안 될 경우 ‘혁신 정당’을 새로 만들 수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후 “실제로 신당을 창당할 생각이냐”고 묻는 다른 의원들의 전화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내에선 ‘비노(非盧)연합 신당 창당’ 추진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신당 창당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새로 당을 만들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신당 추진 세력은 당장 국고보조금과 지역별 정당후원금 등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해 정부로부터 338억원의 국고지원금을 받았다. 동교동계의 막내격인 설훈 의원은 “지금 창당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말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신당 창당에 많은 난관이 있음에도 당의 원로들이 지속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발언을 하는 데 대한 당내 비판도 많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인 이석현 국회 부의장은 6월 3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당의 원로들이 모여서 신당 창당 등 당의 진로를 논의했다고 하는데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또 “우리 당은 혁신에 못지않게 통합이 필요하므로 당 화합을 위해 전력을 다할 의무가 당 대표에게 있다”며 문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
설훈 의원도 방송에서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을 떠나서 신당을 만든다고 하면 호응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어떤 분이 그런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설 의원은 또 “5명이 아니라 50명이더라도 안될 거다. 두고 봐라”고 했다.
추미애 최고위원은 권노갑 고문의 ‘지분’ 발언이 나왔을 때 “DJ의 뜻이 아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당직자 A씨는 “당 원로들이 분열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탈당해서 선거에 출마하거나(정동영), 부정 청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문희상), 비리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김한길·한명숙) 등 여러 가지로 당에 해(害)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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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