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관 기생 ‘홍련’ 사망 시기와생식기 보관 기간 서로 달라 논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일제강점기 당시 명월관 기생이었던 명월이의 생식기가 보관돼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지난 1월 중순에 나간 이후 명월이가 과연 누구인가에 관심이 모아진 적 있다. 동시에 국과수에 보관돼 있던 생식기가 실제로 명월이의 것인지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한 주간지는 지난 4월 경 이 생식기의 주인을 추적한 기사를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이 주간지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생식기는 강점기에 유명 기생집이었던 명월관의 최고 기생 ‘홍련’의 것. 이 주간지는 그 증거로 일본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의 그림을 들었다. 홍련과 연인 사이였던 이시이는 당시 홍련의 그림을 그려 남겼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최근 제기돼 눈길을 끈다. 영혼구명시식으로 유명한 차길진 법사는 “일제가 생식기를 포르말린에 담근 시점과 홍련의 사망 시기가 사실과 다르다”며 주간지의 보도 내용을 반박하고 나섰다.
이 주간지는 “이 그림을 통해서 국과수 생식기의 주인과 명월관 기생 홍련이 상당히 부합한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 그림은 1918년에 그려졌고,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은 ‘홍련’(紅蓮)이었다”며 “그림의 배경으로 볼 때 홍련의 방에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1918년은 이시이가 조선에서 활동할 시기였으며 이때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고, 이 당시 최고 기생집이 바로 ‘명월관’이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명월관의 최고 기생은 ‘명월이’로 알려진 생식기의 주인공이다. 또한, 국과수에 보관 중인 생식기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이 기생의 사망 시점도 30대로 추정되고 있다. 명월관 최고 기생이었던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을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는 근거”라고 확신했다.
“국과수에 보관중인 명월이의 생식기를 폐기하라”며 중앙지방법원에 소장을 낸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도 생식기의 주인이 홍련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혜문 스님은 “여러 정황을 보면 국과수에 보관 중인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은 동일 인물이 확실하다”고 이 주간지를 통해 밝혔다.
진짜 주인은 과연 누구?
차 법사는 홍련의 그림에 대해 “명월이 생식기 관련 기사를 보도한 주간지는 일본 마스모토 시립박물관측이 홍련이의 그림을 찾은 한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내가 이미 2001년 홍련의 그림을 확인한 바 있다”고 말했다.
차 법사는 “2001년 이미 홍련 그림을 확인했으며 마스모토 시립박물관에 이전 전시되었고 박물관장을 만나 찍은 사진도 있다”며 “마스모토 미술관 소장품 보관목록(2002)도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차 법사의 말대로라면 주간지에서 단독 보도한 홍련의 그림은 이미 9년 전 한국인 차 법사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그렇다면 차 법사는 왜 국과수 생식기가 논란이 되었을 때 홍련의 그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차 법사의 답은 간단했다. “홍련은 국과수에 보관돼 있는 생식기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차 법사에 따르면 홍련은 6·25 발발 첫 해에 피폭으로 사망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점기에 보관된 생식기는 홍련의 것일 수가 없다. 차 법사는 “개인적으로 홍련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홍련을 알게 된 계기를 소개했다.
기생 홍련과의 만남
2001년 11월 19일 한 스포츠 신문에 <명월관 ‘홍련’ 19년만에 환생?>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일본 쓰쿠바에 거주하는 한국인 여성 신정은씨(33)가 강점기 명월관 기생 홍련과 판박이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씨의 전생이 홍련이라는 차 법사의 주장이다.
차 법사에 따르면 어느 날 차 법사를 찾아온 신씨를 보고 차 법사는 깜짝 놀랐다. 신씨를 보니 일본 마스모토 박물관에서 본 홍련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에 차 법사는 신씨의 전생이 명월관 기생 ‘홍련’이라며 마스모토 시립박물관에 걸린 홍련의 초상을 확인해보라고 신씨에게 권했다. 이 일화는 같은 해 12월 23일 ‘주간 한국’, 2002년 도서 ‘귀가 따가운 남자(신동립 저)’에도 실렸으며 2002년 5월 5일에는 MBC ‘와! 놀라운세상, 서프라이즈’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당시 차 법사는 홍련의 전생에 관해 “홍련의 성은 신씨다. 홍련은 신정은씨의 왕고모할머니로 신정은의 전생은 바로 홍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차 법사에 따르면 근거는 1918년 여름 일본인 화가 이시이가 명월관을 찾아가 그린 홍련(당시 18세)의 초상화다. 일본 마스모토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회화 속 홍련의 모습은 놀랍게도 현시점의 신정은씨와 똑같다. 신씨와 대면한 관장을 비롯한 박물관 직원들은 ‘홍련의 환생’이라며 경이로워했다.
놀라운 것은 이 뿐 아니다. 얼굴과 몸매도 판박이가 따로 없다. 홍련과 신씨는 삶 자체도 거의 비슷해 놀랍기만 하다. 홍련은 조선총독 테라우치를 비롯해 헌병대장, 야쿠자, 만주진출 건설업자 등 당대 식민 조선에서 힘깨나 휘두르던 일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이어 일제 말 조선의 G권문세력가의 애첩으로 들어갔다 나온 홍련은 일본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홍련의 결혼생활을 오래가지 못했다. 홍련은 남편이 폐결핵으로 죽은 뒤 홀로 살다가 6·25 발발 첫 해에 피폭 사망하는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전생일까 우연일까
기구하기는 신씨도 마찬가지다. 외모 뿐 아니라 인생까지도 똑같아 환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신씨는 1969년 한국에서 태어나 G예술계 고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작고)는 일본에서 활약하던 한국인 대중음악가. 딸 정은을 무사시 음대에 입학시키려고 일본으로 데려갔지만, 그녀는 밤의 세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생활로 빠져들고 말았다. 일본 S재벌과 3년간 동거했고, 국내 H그룹 회장의 아들과는 혼사 직전 ‘과거’가 들통나는 바람에 파혼한 이력도 있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긴자의 꽃’이 되었다. 현지 정·관·재계 실력자들은 물론, 언론계의 거물 J씨(작고)와 체육계의 큰 손 U씨 등 우리나라 각계각층 거물급 인사들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씨가 사랑한 남자는 최대규모 야쿠자 조직의 두목인 N. 그러나 ‘깡패사위’를 거부한 부친의 강요로 재차 내한, 평범한 한국 남성과 결혼했으나 1년 반만에 파경을 맞았다. 결국 또 일본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신씨. 그는 현재 야쿠자 N, 인터넷 기업가 D 등의 보호와 후원 아래 부유하게 살고 있다고 차 법사는 설명했다.
한편 차 법사는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 현지에서 홍련을 소재로 찍은 ‘마쓰모토’(2002·차현석 연출)라는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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