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박시은 기자]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기업 고용세습 관련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대기업들이 직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이 같은 규정을 두고 있는 곳은 대우조선해양, 기아자동차, GS칼텍스 등이다. 이에 취업준비생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의 시선도 짙다. 반면, 노동계는 “해당 사안 개선에 대한 노력과는 별개로 고용노동부가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훼손하려는 목적으로 우선채용 문제를 이용해 노동계를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계 “단체교섭권 훼손하려 해당 조항 이용”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라고 불릴 만큼 청년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 청년실업률은 10.2%를 기록했다. 이는 1999년 6월 이후 16년 만에 최고치에 달하는 수치다.
이런 가운데 주요 대기업 3곳 중 1곳에서 고용세습이 이뤄지는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있는 매출액 상위 30개 대기업 중 우선 채용 규정이 있는 사업장은 11곳에 달한다. 또 인사·경영권에 대한 노조의 동의(합의)조항을 둔 곳은 14 곳으로 나타났다.
해당 규정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대우조선해양과 기아자동차, GS칼텍스, SK이노베이션, 한국지엠, 현대중공업, 현대오일뱅크, LG화학, SK하이닉스, 현대제철, LG유플러스 등 11곳으로 확인됐다.
이들 회사는 대체로 정년퇴직자, 장기근속자, 업무상 재해로 인한 사망자(또는 장애인)의 경우 직계가족의 채용을 우선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회사는 종업원 신규채용 시 동일한 조건하에서는 당사 종업원의 자녀를 우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아자동차는 ‘회사는 인력 수급계획에 의거 신규 채용 시 사내 비정규직, 재직 중 질병으로 사망한 조합원의 직계가족 1인,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25년 이상)의 자녀에 대해 채용 규정상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GS칼텍스와 SK이노베이션도 ‘정년퇴직, 업무상 재해로 순직 또는 퇴직했을 경우 자녀 등 직계가족의 우선 채용을 도모한다’고 규정해놨다.
한국지엠 역시 ‘직원의 신규 채용 시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 재직 중 사망자, 업무상 재해나 개인 신병으로 불가피하게 퇴직한 자의 직계가족을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 같은 우선·특별채용 규정은 고용정책기본법과 직업안정법 등에 명시된 고용상 균등처우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법상 평등권과 직업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13년 울산지법은 “현대자동차 노조 단체협약상 특별채용 관례가 사실상 일자리를 물려주는 결과를 낳아 우리 사회의 정의관념에 배치된다”며 “약정 무효다”고 판시한 바 있다.
때문에 우선 채용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은 ‘현대판 음서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취업준비생들의 원성이 높다. 박탈감뿐만 아니라 무력감까지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A씨는 “부모님이 대기업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기회를 얻는다는 것에서 박탈감을 느낀다”며 “똑같이 고생하고 힘들어하면서 취업을 준비한 끝에 최종면접까지 보게 되는 건데, 우선채용 조항으로 인해서 합격 당락이 갈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운이 빠진다”고 말했다.
박탈감? 무력감?
대학교 졸업 후 2년여간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B씨는 “요즘은 88만원 세대란 말이 익숙해지다 못해 더 힘들어지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며 “부모님 사업을 물려받는 식의 대물림도 아니고, 채용과정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조항이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의 경우만 봐도 부모님 직업이 뭔지, 다니는 회사가 어딘지 물어볼 수도 없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왜 부모님의 경력으로 자녀들이 영향을 받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취업준비생 C씨는 “솔직히 대기업 다니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은 금수저는 아니라도 은수저쯤은 물고 태어난 환경이다”며 “대학교 등록금만 생각해봐도 부모님이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은 등록금 걱정이 없다. 대다수 대기업에서는 복지 혜택으로 자녀의 등록금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엔 아르바이트, 학자금대출 등으로 등록금을 감당하고 있다. 이렇게 출발선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속상한데 채용 순위에서까지 밀린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대기업 사원들이 누리는 경제적 지위, 복지 때문에 대다수 취업준비생들이 대기업에서 근무하길 바라지 않나. 그런데 부모님이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면 이 같은 목표를 가져도 또 하나의 장벽을 더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취업이 더 막막해졌다”면서 “이 같은 조항은 사회계급화를 고착시키고, 기회의 평등을 가로막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무상 재해로 인한 사망자 혹은 장애인에 대한 우선·특별채용의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2013년 울산지법의 판시에서도 “업무상 재해로 인한 사망자에 대한 우선 특별채용은 적용을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불가피한 상황의 경우 예외로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업무상 재해로 인한 가족의 취업은 그 사유가 예외적인 경우로서 취업자 비율이 높지 않아 제3의 기본권 침해 정도가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거나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시선이다.
숨은 목적 따로 있다
이와 관련해 노동계는 “고용노동부가 엉터리 실태조사로 노사 단체협약에 개입하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선채용에 대한 문제가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 단체협약 실태조사로 인해 불거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선채용의 문제를 무작정 실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고용노동부가 ‘노동시장개혁’에 대한 반발성 총파업을 앞두고 노동계를 압박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은 “고용노동부는 매출액 기준 상위 30대기업으로 자료를 발표했으나, 실제 기업순위를 기업으로 하면 50위 사업장까지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며 “모집단 기업을 30개로 설정한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을뿐더러 불법이라고 주장한 우선채용 조항 단체협약이 있는 사업장도 4곳이나 더 부풀려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년·장기근속 조합원 자녀 우선채용 조항 전체를 불법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우선채용’ 조항이 있는 사업장을 수정한 비율은 16.7%로,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36.7%와 20%가량 차이가 난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해당 조항은 일부 직원이 산재로 사망하면서 유족들 생계지원 문제로 들어간 조항이며 불법으로 시행된 사례도 없다. 왜 이 시점에서 문제를 삼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 “고용노동부는 노동조합을 기득권세습 집단으로 만들고자 고용세습 논란을 하나의 빌미로 삼았다”며 “고용노동부의 시정지도 단체협약 대상에는 ‘인사·경영권 관련 노동조합 동의(협의) 조항’도 포함돼 있으며, 인사·경영권을 이유로 사용자 일방에 유리하도록 단체협약을 개악하겠다는 것이 감춰진 노림수다”고 주장한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역시 민주노총과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우선채용 논란으로 거론되고 있는 기업들도 “우선채용 조항으로 인한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논란이 되고 있는 조항은 상징적인 조항에 불과하다”며 “이 조항으로 직원들이 채용과정에 개입하지도 않고, 지원한 자녀가 떨어졌다고 해서 불만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사례 역시 많지 않으며 노동조합 단체협약에 명시된 것처럼 산재사고가 나는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불이익이 발생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업무상 재해에 따른 상황을 염두에 둔 조항이며, 채용 과정에서 매겨지는 점수는 인사담당자 외에는 알 수도 없고 개입할 수도 없다”고 전했다.
다만 “해당 조항이 무조건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지만, 논란이 된 만큼 노동조합 측에서도 조항 수정, 개선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