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스포츠 도박’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도박’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연스럽게 ‘스포츠’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도박이 큰 이슈가 됐던 건 5년 전 프로축구에서 국가대표 출신이었던 최성국 선수가 연루된 사건이 발각되면서부터다.
당시 선수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0여명이 구속됐다. 최씨는 그 사건으로 선수자격이 영구 박탈됐다. 이후 프로농구에서도 스포츠 도박 사건이 발생했다. 2013년 강동희 전 원주동부 감독에겐 의정부지법에서 징역 10월과 추징금 4700만 원을 선고했다. 그런데 최근 전창진 안양 KGC 인삼공사 감독이 스포츠 도박설에 휩싸였다. 비록 전 감독은 부인하고 있고 경찰이 수사 중인 상황이지만 유명 감독초자 스포츠 도박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많은 사람들이 씁쓸해 하고 있다.
국내 불법 스포츠 도박 규모, 한 해 14조 700억 원
승패·쿼터별 승부·선수 간 대결 등 다양한 베팅 가능
국내 불법 스포츠 도박 규모는 한해 14조 7백억 원으로 추산된다. 축구, 농구, 야구 등 대부분의 스포츠가 도박에 이용된다.
유명 선수나 감독이 스포츠 도박에 빠지게 되는 경로는 대부분 지인 때문이다. 지인에게 부탁을 받는 경우가 많고 다음이 돈 때문이다. 최성국 선수의 경우 고향 선배의 청탁을 들어주면서 스포츠 도박에 연루됐다.
어차피 질 경기인데 부탁을 들어달라는 식의 청탁은 선수조차 아무런 거부감이 없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돈을 받아 다른 선수에게 건넸고 이건 아니다 싶어 거절할 때는 이미 늦었다.
최성국 선수도 돈을 다시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자신에게 돈을 준 지인은 물론 다른 관계자들이 이미 게임에 베팅을 한 상태였다. 최씨가 돈 전달과 승부조작을 거부하자 결국 제3의 인물을 등장시켜 최씨에게 압박을 가했다. 한마디로 협박이었다.
당시 최성국 선수는 중국인 보스에게 압박을 당했다고 밝혔다. 8명 정도의 무리가 모여 있는 곳에 불려갔고 그곳에서 중국인 보스가 “퇴장이라도 당해라” “자살골이라도 넣어라”라는 발언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 해도 그런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뒤늦게 자신이 불법 스포츠 도박단에 연루되었음을 알았지만 헤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강동희 전 감독도 지인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승부조작 제의를 받았다. 2011년 2월 판교의 한 음식점에서 동석한 지인과 같이 온 사람에게 “지는 경기를 해주면 1경기 당 1500만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이후 조금 수위를 낮춘 제안을 또 받았다. “1경기 전체를 조작하는 것이 어려우면, 1쿼터만이라도 지는 쪽으로 해보자. 상대팀 전력이 약하니 1쿼터를 져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지 않냐. 그렇게 하면 10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을 강 전 감독에게 지인이 전달했고 그 지인은 강 전 감독이 “경기 전체는 어렵지만, 1쿼터는 한번 해보겠다”고 답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물론 강 전 감독의 법정 진술은 “그러면 1쿼터에 한번 뛰어보겠다고 얘기한 것 같다”로 조금은 다르지만 결국 ‘한 쿼터의 승부를 조작하는 것’에 동의한 셈이었다.
국내외 모든 스포츠
도박 가능해
현재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스포츠 도박은 그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대부분 해외에 서버를 두고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개설한 뒤 국내에서는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베팅을 한다.
종목도 국내외 모든 스포츠를 망라한다. 축구의 경우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등의 2부 리그 경기까지 베팅이 가능하다. 또 경기 승패 외에도 쿼터별 승부, 선수 간 대결 등 다양한 형태의 베팅이 가능하다.
지난 2월 부산에서는 회원 3만 명 규모에 거래된 판돈 규모가 490억 원대에 이르는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이 검거됐다.
당시 이들은 중국 선양시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인터넷사이트를 제작·관리하는 프로그래머 A 씨와 B씨에게 PC·모바일용 불법 도박 사이트 제작을 맡긴 후 관리하도록 했다. 국내 사무실에서는 3만 명의 회원을 관리하면서 높은 배당금을 지급했다.
이들은 회원을 관리하면서 베팅 상한선을 없애고, 높은 배당금을 지급하는 수법으로 부당이득을 챙겼다. 이렇게 해서 번 돈으로 운영자들은 고급 아파트와 외제차 3대 등을 차명 보유하고 있었다.
모집책 수익
잃은 돈의 30%
불법 도박 사이트를 개설하면 도박할 사람을 모집하는 모집책들이 분주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음성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잘 노출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인터넷이나 스팸문자 등으로 모집책을 모은다. 일부는 서울의 유명 룸살롱 업주들과 짜고 사람을 모으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아프리카TV BJ 등을 활용하기도 했다. 아프리카TV는 각종 스포츠나 게임 대회 등 많은 부분을 실시간 시청이 가능하며, 개인 BJ가 자신만의 방송국을 열고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
BJ는 실시간 방송 등을 통해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추천 아이디를 제공, 회원으로 모집해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와 연결해준다.
모집책들의 수익은 도박하는 사람들이 돈을 잃어야 발생한다. 보통 잃은 금액의 30%정도다. 물론 상황에 따라 금액은 더 커지기도 한다. 사실 스포츠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은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
실제 베팅금액보다 배당금이 많을 경우 일부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는 고객을 임의로 탈퇴시키기 때문이다. 수익을 많이 내는 고객은 쫓고 돈을 많이 잃는 사람만 남기는 구조다 보니 자연스레 모집책들이 버는 돈은 쌓여가고 돈을 잃는 고객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소프트웨어 업체 위장
도박 사이트 운영
앞선 범죄방식은 일반적인 불법 스포츠 도박단 사례다. 최근에는 이보다 더 지능적인 수법이 사용되고 있다. 위장 회사를 차려 불법 스포츠 도박을 하는 경우다.
지난 5월에는 경북지역에서 검거된 불법 스포츠 도박단은 중국에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차리고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를 운영해 오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 붙잡힌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운영자는 2012년 6월부터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차리고 불법 스포츠도박 사이트를 개설한 뒤 회원 약 3만 명에게서 4천200억 원 상당의 베팅금을 입금 받았다.
이들은 자체 프로그래발 개발팀을 두고 수십개 도박 사이트를 개설한 뒤 고객이 국내외 각종 스포츠 경기에 돈을 걸면 경기 결과를 맞힌 회원에게 배당금을 주고 못 맞힌 회원의 돈을 걷는 방식으로 최소 922억원의 수익을 거둔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상하이, 옌타이 등 중국 곳곳에 본부를 만들고, 본부끼리 경쟁을 붙여 성과급을 지급했다. 그 결과 각 지역본부 직원은 주 컴퓨터로 경기상황과 도박 진행상황을 지켜보며 고액 당첨금이 예상되는 회원에게 회유와 협박을 해 당첨금을 깎거나 주지 않는 ‘먹튀’ 수법으로 수익을 늘렸다.
이 회사는 각종 취업포털사이트에 유망 IT기업으로 소개하며 개발자를 모집했고 상당수 직원은 내막을 모른 채 취업했다. 검거된 운영조직원 18명 가운데 취업 준비생을 포함해 13명이 이런 방식으로 입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운영자들은 수익금으로 고급 외제차를 몰거나 외국 유명 호텔에서 한 번에 3천만 원을 들여 파티를 여는 등 호화생활을 했고 일부는 마약까지 했다.
경찰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불법 스포츠 도박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지난 3년 동안 13만 개가 넘는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접속을 차단했다. 하지만 인터넷 특성상 주소를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에 단속에 끝이 없다.
전문가들은 불법 도박 사이트 접근을 차단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자금줄을 끊는 쪽으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또 외국과의 공조가 절실한 만큼 외국 사법기관과의 협력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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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