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을 종종 관람하는가.
▶연극을 안 봤다. 2년 동안 칩거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구름을 타고>를 봤다.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지난 3월 28일~4월 4일까지 공연) 굉장히 따뜻한 연극이었다. 신체적 불구를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무엇을 하며 지냈나.
▶심적으로 편할 때는 영화를 보거나 등산, 자전거를 탔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때는 술도 먹고 여러 가지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2년 동안 백수로 지내던 끝에 안석환 선배의 상갓집에서 박근형 연출을 만났다. 요즘 뭐하냐고 묻기에 놀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전화가 왔다. 연출을 맡은 작품이 있는데 와서 리딩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요청이었다.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몇 명의 중심인물을 리딩 했고 바로 캐스팅됐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리딩을 요청한 이유가 있을까.
▶박근형 연출은 나와 처음 작업한다. 미리 캐스팅을 염두 한 경우가 아니므로 이 배우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을 것이다. 박근형 연출은 내가 ‘카즈오’를 연기하길 바랐다.
-연극에 등장하는 세 명의 히키코모리는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행동을 저지르거나,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나.
▶‘모리타’가 “남들이 무섭고 내게 화를 내는 것 같다”는 고백을 할 때 서로 공감이 오가는 장면이 있다. 나도 모리타 같은 상태인 적이 있었다. 남들이 쳐다볼 때 남들의 눈을 제대로 못 보고,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운 마음. 최근 2년 동안 겪던 일이다. 작품을 하지 못하다 보니 인생에 대한 반성과 후회가 밀려왔다.
-카즈오는 어렵지 않게 소화 가능한 인물이었나, 감정이입을 하는 데 고충이 있었나.
▶맡은 역할에 살을 찌우고 생각을 부여하는 일은 항상 해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바뀐 연기 스타일을 보여줬다는 것이 특별했다. 과거에는 에너지 넘치고 지랄발광하고 난리를 치는, 온갖 욕망을 인물에 투영해 그 역할과 이남희가 동시에 발현되게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제했다. 많은 치기를 안으려고 노력했다. 카즈오 자체가 방안에서 혼자 20년간 있으면서 온갖 생각과 의식을 거친 인물이다. 절제를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던 카즈오가 처음 말끔한 옷차림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카즈오 연기가 다소 어색하고 위태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캐릭터와 배우가 착 달라붙지 못한 것 같은 인상까지 받았다.
▶20년을 히키코모리로 살다가 밖으로 나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했다. 그 고민의 단초가 된 것은 밖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내뱉은 첫 마디 “오늘은 굉장히 어정쩡한 날씨네요”다. 카즈오를 표현하는 느낌을 여기서 찾았다. 날씨를 ‘어정쩡한 날씨’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즈오는 세상과 사물을 오랫동안 고찰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처음 밖에 나왔을 때, 말을 하기 전에는 가슴이 뛰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적절하다고 느껴지는 말을 찾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관객이 카즈오의 연기에서 어떤 붕 뜬 인상을 받았다면 이 같은 의도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카즈오의 압권은 ‘개구리 왕눈이 스파게티’와 관련된 과거를 고백할 때다. 담아뒀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인데, 이 장면을 연기할 때 배우 이남희의 감정 흐름이 궁금하다.
▶이 장면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연출자와 내가 수정한 부분이 있다. 원작을 그대로 옮겼을 때 전달하기 모호한 요소가 존재했다. 이 장면을 연기할 때면 매 공연마다 다른 감정이 차오른다. 누군가 20년 전 스파게티를 주문하지 못했을 때의 기억을 꺼내 놓는다고 생각해보자. 그 기억이 슬플 수도 있을 것이고 울컥하거나 분노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최근에는 어려가지 감정 중에서 주로 분노를 삭이는 감정 상태를 안고 갔다. 이 상태의 근원은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해석이다.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노력은 좋은 연기의 기본이다. 하지만 나도 한 때는 ‘어떻게 하면 연기를 더 잘할까’ 생각만 하느라 진지한 자문을 등한시한 적이 있다.
-방금 질문은 배우마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사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됐다.
▶아무리 단역이라도 그 인물의 일생이 담겨 있고 매력이 존재할 수 있다. 그 매력을 찾게 되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아픔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할 때 배우 또한 동일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고 치자. 대사를 내뱉으면서 치유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나.
▶배우는 자신을 위해 연기하지 않는다. 배우가 자기감정에 취하면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배우가 힘들고 괴롭고 최선을 다할 때만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역할 속에서 개인적인 만족을 느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이번 연극은 아들이 부모를 폭행하는 패륜이 있고, 시종일관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그런데도 의외로 눈물을 흘리고, 극이 끝나도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봤다. 그 힘이 무엇인가.
▶이 연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 기본적인 감정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했다. 아픈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세 명의 히키코모리 외에도 예를 들어, 직장을 잃은 아버지가 떠돌아다니는 모습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 그것이 작품에 대한 호응으로 이어진 것 같다.
-선후배로부터 자극 되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나.
▶타고난 감각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 감각은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연기가 늘지 않는 것에 절망해 서른 살이 좀 넘었을 때, 성수대교 밑을 보며 자살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연기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잘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고통이 심했다. 한 번은 정동환 선배로부터 “넌 연기를 정말 잘한다.”, “넌 연기를 진짜 못한다.”는 말을 한 자리에서 연이어 들었다. 선배의 의도를 시간이 많이 지난 뒤 생각해봤다. 작품, 인물과 잘 맞을 때는 빼어나게 흘러가지만, 내 방식과 개성이 너무 돋보일 때는 단점으로 작용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본인 연기의 장단점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과거 유인촌 선배로부터 “네 연기는 럭비공 같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의미다. 나는 박제된 연기를 싫어했다. 무게 잡고, 정형화된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비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다만 앞으로는 럭비공같이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을 조금 절제하고 싶다.
-좋은 상대 배우는 함께 연습하고 공연할 때 어떤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하는가.
▶배우는 각자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대본 분석, 신체 활용, 세상을 보는 눈 등에서 달라야 한다. 마음을 열어야 서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
-같은 역을 몇 달 이상 반복하는 배우를 볼 때 힘들고 지루하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은 그 많은 반복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감정을 태우는가. 아니면 몸에 밴 기술로써 버티나.
▶기술적으로 연기하기 시작하면 연기가 안 좋아지고 매너리즘에 빠진다. 매순간 계속, 계속 감정을 태워야 한다. 공연 기간이 길수록 더욱 집중하고 인물을 위해 노력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후반에 접어들면서 긴장도 풀리고 배우들끼리 장난도 치면서 전체 수준이 낮아지는 경우가 있다.
-독특한 목소리에 대한 자각은 젊은 시절에 이미 끝마친 상태인가. <아트>, <우어 파우스트>에서 강한 캐릭터가 잘 어울렸는데, 그 원동력을 표정과 목소리로 꼽았다.
▶철저하게 훈련을 통해서 지금의 목소리가 됐다. 젊은 시절 성격도 소심했고 성량이 아주 작았다. 그때 발성 훈련을 무리하게 하다가 목이 갈라졌다. 그 과정을 겪고 나서 목소리가 변했다. 신구 선생님도 훈련을 통해 그 목소리를 만드셨다. 과거 ‘신구가 소리 훈련을 너무해서 남산이 무너진다.’라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음악, 문학, 미술 등 다른 예술에 애정을 품고 있는가.
▶배우를 꿈꾸기 전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시를 쓰고 백일장도 나갔지만, 스스로 되기 힘들다고 판단해 접었다. 대신 ‘몸으로 시를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연극을 시작했다.
-평소 신의 유무,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나.
▶지난 2년 동안 통곡하면서 운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한겨울 눈이 쌓인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계곡에서 술을 마시다 갑자기 설움이 견딜 수 없게 밀려왔다. 또 한 번은 광주 무등산 호텔에 묵을 때다. 오랫동안 울면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혼자 죽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다.’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 때 죽음을 느꼈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창환 기자 hojj@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