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빚 받으러 지구 끝까지 출동한다
헤지펀드, 빚 받으러 지구 끝까지 출동한다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 입력 2015-06-15 11:10
  • 승인 2015.06.15 11:10
  • 호수 1102
  • 5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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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시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너무 헐값에 인수” 주장
아르헨티나, 헤지펀드 소송으로 국가 부도 맞기도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주식 7.12%를 확보해 갑자기 삼성물산 3대 주주로 등장해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헐값에 인수·합병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나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7월 17일로 예정된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 결의안이 처리되지 못하도록 해달라며 주주총회 결의금지 가처분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내놓은 상태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1%를 비롯해 제일기획 12.6%, 삼성SDS 17.1%, 제일모직 1.4% 등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삼성전자 지분만 해도 8조 원이 넘는 등 보유한 계열사 지분 가치는 14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삼성물산의 시가 총액 11조8800억 원(6월 5일 종가 기준)보다 많다. 엘리엇의 주장은 삼성그룹이 이런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삼성물산을 제일모직에 헐값(삼성물산 주식 1주를 제일모직 주식 0.35주와 교환하는 방식)에 합병하려 한다는 것이다.

엘리엇의 삼성전자 주식은 7.12%에 불과하지만 엘리엇의 대표인 행동주의 투자가 폴 싱어는 국제 금융계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바리’로 통한다. 싱어가 이번에 삼성그룹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단지 삼성물산 주가를 끌어올려 단기 차익을 올리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속셈이 있는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벌여오고 있는 채권 회수 투쟁은 그의 투자 행태를 짐작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바리’

2014년 7월 30일 아르헨티나는 2001년에 이어 13년 만에 다시 국가부도를 냈다. 채권자들에게 지급하려던 이자 5억3900만 달러의 지급기한을 본의 아니게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그 해 아르헨티나는 채권자들과 오래 협상한 끝에 “일단 원리금의 30% 정도를 조만간 갚고 나머지 원리금은 형편이 닿는 대로 갚을 테니 우선 이자로 이 돈이라도 받아 가라”고 채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5억3900만 달러를 마련해 채권자들에게 곧 나눠줄 참이었다. 채권자들 대다수는 아르헨티나의 2001년 국가부도 때 이 나라에 돈을 물린 투자자들이었다.

그런데 그해 6월 채권자 가운데 한 명인 싱어가 “폴 싱어가 아르헨티나 정부의 부채 상환에 응할 때까지 여타 채권자들은 부채를 상환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미국 대법원에서 얻어냈다. 폴 싱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폴 싱어를 뺀 다른 채권자들에게 채무 상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법원의 이런 결정은 아르헨티나가 애당초 채권을 발행할 때 “채권 상환 절차와 관련해 미국 법원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동의해 놓았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었다. 싱어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설득한 채권자들에게 5억3900만 달러를 지급하는 것은 자기가 알 바 아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에 설득 당하지 않은 자기와 몇몇 채권자는 모두 합쳐 15억 달러를 받아야 하겠다면서 이 돈을 내놓으라고 줄곧 요구했다. 그러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미국 법원의 결정을 들고 와 아르헨티나를 압박했고, 싱어의 요구를 들어줄 힘이 없었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국가부도 사태를 당하고 말았다.

싱어가 빚을 일부만 갚겠다는 아르헨티나를 끝까지 압박하여 국가부도로 몰고갔던 것은 그가 앞서 거둔 성공에서 용기를 얻어 대담해졌기 때문이라고 당시 금융계 관측통들은 추측했다. 싱어는 1996년 정부가 지급 보증한 페루 은행 부채를 약 1100만 달러를 들여 사들였다. 그런데 페루는 2000년 싱어에게 은행 부채 5800만 달러를 지급키로 했다. 싱어로서는 400% 넘는 수익을 올린 것이다. 이토록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까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미국, 영국, 룩셈부르크, 벨기에, 독일, 캐나다의 법원을 부지런히 드나든 것밖에 없다고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당시 법률적인 문제에 있어 페루 정부를 대표했던 중재 전문 변호사 마크 심롯은 싱어를 가리켜 “그는 곤궁한 국가를 찾아 그곳 부채를 매입하고 완전 변제를 요구한다. 그는 그 나라의 경제상황, 빈곤, 형편은 개의치 않는다”면서 “그의 관점에서 그는 ‘그게 뭐가 잘못됐나?’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도 그가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면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군함까지 일시 압류 당해

싱어는 아르헨티나가 2001년 950억 달러라는 거액의 부도를 내기 전부터 이 나라 채권을 사기 시작했다. 국가부도로 아르헨티나가 엄청난 혼란에 빠졌지만 싱어는 개의치 않고 부도난 채무를 헐값에 계속 사들였다. 아르헨티나의 채권자들 대부분은 2005년과 2010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제의, 즉 달러 당 약 30센트로 쳐서 빚을 갚겠다는 부채상환 조건을 수락했다. 하지만 싱어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그가 페루에 최소한 17억 달러를 청구할 수 있다는 법원 결정을 얻어낸 다음 빚을 받아내려고 지구촌을 훑기 시작했다.

카리브해(海)의 영국령 케이먼제도(諸島)에 본사를 둔 싱어의 자회사 NML캐피털은 2004년 판사를 설득하여 아르헨티나 정부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자국의 군용 창고 네 채를 처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판결을 얻어냈다.

당시 아르헨티나 국방부 대변인은 이 판결로 건물, 자동차, 무기, 비행기 한 대 등 300만 달러의 자산이 동결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NML 측 변호사는 그 판결이 단지 부동산에만 효력을 미쳤다고 해명했다.

싱어는 2012년 아프리카 서해안 가나에 정박해 있던 아르헨티나 군함 한 척을 일시 억류했다. 이 훈련용 프리깃함에서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이 군함을 놓아주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 군함은 출항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벌처펀드(부실기업이나 부실채권에 투자하여 수익을 올리는 자금)들이 아르헨티나 군함을 차지하려 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르헨티나의 “자유, 주권, 존엄”은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싱어가 악착같이 아르헨티나 자산을 추적하는 것을 본 다른 채권자들도 싱어처럼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3년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제트기 한 대를 임차하느라 88만 달러를 지출해야만 했다. 정비를 받으러 미국으로 가던 대통령 전용기를 채권자들이 압류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화재도 안전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채권자들에게 압류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국립박물관 측이 2010년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 출품한 자국 문화재를 따로 관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scottnearing@ilyoseoul.co.kr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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