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세월호 참사’에 이어 ‘메르스 사태’로 정국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두 국가적 재난 사태는 그동안 여야 정쟁과 내부 계파 갈등을 잠재우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적폐인 계파 갈등은 국가적 재난속에서도 낭중지추처럼 나타났다. 새누리당은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두고 ‘유승민 책임론’이 일면서 계파간 갈등이 폭발직전까지 치닫다 메르스 사태로 조용해진 상황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재보선 패배에 따른 ‘문재인 책임론’이 혁신위 출범으로 계파간 갈등의 소지를 일단 봉합했지만 여당은 외부적 요인으로 내부적 갈등이 잠잠해진 터라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 중심에는 김무성 당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K-Y 라인이 있고 서청원 최고위원과 강경 친박 의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친박과 비박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집단간 정치적 생명을 건 대전(大戰)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 “이대로는 공멸” 박근혜 정부 동력찾기 시동
- 친박계, 낮엔 ‘유승민 책임론’…밤엔 ‘러브콜’

친박계 의원들이 주축이 돼 만든 ‘국가경쟁력 강화포럼’이 나섰다. 친박 강경파인 윤상현 정무특보가 간사를 맡고 있는 모임으로 김용남, 김진태, 김태흠, 이장우 의원 등 27명의 의원들이 6월 2일 토론회를 통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문제점을 쏟아냈다. 특히 김태흠, 이장우 의원 등은 이 자리에서 “유 원내대표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몰아세웠다.
친박 의원들 주축 ‘국가경쟁력 강화 포럼’
반면 비박 진영의 ‘유승민 구하기’도 나타났다. 비박계 중진 홍문표 의원은 [일요서울]과 인터뷰에서 “국회의원 211명이 찬성해 통과된 법을 왜 유 원내대표가 책임을 지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정치 공세”라고 일축했다. 정병국 의원 역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특정 사람을 놓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향후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친박계의 주장에 반박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무성 대표도 나섰다. 김 대표는 “정략적으로 국민 갈등을 부추기고 도의에 어긋난 말로 서로 비방하는 것은 품격을 떨어뜨리고 불신을 자초하는 행위”라며 사실상 유 원내대표 손을 들어줬다. 이에 친박계 원로이자 맏형격인 서청원 최고위원은 “앞으로 당 대표라고 하더라도 국회법 개정을 얘기한 사람은 당 싸움 일으킨 사람이고, 본인은 아무런 문제 없다고 (국회법 개정안 관련) 얘기한 사람을 나무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기 바란다”고 쏘아붙였다.
사실상 ‘국회법 개정’논란은 친박 비박 전면전 양상으로 번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친박 비박 당·청 간 갈등이 터지기 직전 메르스 발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여당은 ‘일단 국민 불안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라면서 계파 갈등을 잠재우고 정부와 협력을 약속했다. 여야 간 초당적으로 메르스 대책기구를 만들었고 새누리당은 당·정·청 메르스 대책회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여당의 제안에 청와대는 “대통령 주재 정부와 대책회의를 한다”며 사실상 당을 배제하고 “우리끼리 하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노출했다.
친박, 비박, 당과 청와대 갈등이 ‘메르스 파문’으로 숨죽인 사이 친박 내에서는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친박 내 ‘유승민 책임론’을 제기한 인사들이 유 원내대표와 친분이 깊은 김세연 의원을 통해 ‘본심이 아니었다’고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여권에 정통한 한 인사는 “친박 내 강경 분위기에 편승해 유승민 책임론에 동참했던 친박 인사들이 김 의원을 통해 유 원내대표에게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달라’는 뜻의 부탁이 줄을 이었다”며 “아무래도 친박에겐 내년 공천권을 염두에 둔 보험 성격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당내 몇 안 되는 ‘유승민계’로 불리는 김 의원은 유 원내대표와 같은 정치인 2세 출신이다. 유 원내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은 대구 중구에서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의원의 부친은 김진재 전 의원으로 부산 동래·금정에서 11대, 13~16대까지 5선을 지냈다. 대구를 대표하는 유 전 의원과 부산을 대표하는 김 전 의원이 친분이 깊었고 아들인 두 인사 역시 정치인2세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친분이 깊은 점을 친박 인사들이 연결고리로 삼은 셈이다.
정권·친박 위기 속 ‘탈박’ 가속화 조짐
몇몇 친박 인사들의 탈박 현상은 서청원 최고위원에게 정권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의 이른바 ‘K-Y라인’이 구축된 이후 새누리당은 비주류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친박 주류는 고립되는 양상이다. 내각에 친박 인사들이 포진하면서 ‘친박 친위’ 정부로 바뀐 것과 대조된다. 새누리당에선 ‘탈박(脫朴)’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친박’ 용어는 2004년 천막당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총선 승리를 이끌면서 처음 등장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친이계와의 다툼으로 본격화했다. 이들은 지난 10여년간 원박, 신박, 구박(舊朴), 멀박(멀어진 친박), 복박(돌아온 친박), 월박(친박으로 넘어감), 주이야박(낮에는 친이, 밤에는 친박), 짤박(잘린 친박), 탈박 등 숱한 용어를 만들면서 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집권 2년 만에 와해를 걱정할 만큼 왜소해가고 있다. “2016년 총선에서 친박으로 공천을 받겠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친박 ‘맏형’격인 서 최고위원이 정권 방어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섰다. 자칫 정권과 친박계의 동력 상실이란 ‘쌍둥이 위기의식’의 발로다. 일단 서 최고위원은 적진보다는 아군을 향해 ‘쓴소리’를 보내며 친박 세력 재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이대도강(복숭아나무 대신 자두나무를 쓰러뜨림. 작은 손해를 보는 대신 큰 승리를 거두는 전략을 이르는 말)전략이다.
서 최고위원은 8일 최고회의에서 박 정부의 내각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 자리에서 그는 “박근혜 정부 내각에 위기관리를 할 인물이 보이질 않는다”며 “이는 리더십 있는 인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가 확산됐다”고 말했다. ‘메르스 파문’을 빗대어 던진 말이지만 속내는 이와 다르다는 게 여권 내 시각이다. 일단 서 최고의 발언의 대상자는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청와대의 이병기 비서실장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최 부총리의 ‘초이노믹스’는 기록적인 수출 부진을 초래하는 등 경제 부양에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 장관은 메르스 초기 대처 국면에서 ‘문형표 저주’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 실장은 취임 이후 새누리당의 ‘K-Y라인’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비박계 지도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해 친박 친위부대까지 균열된 모습으로는 비박계의 공세를 넘기 힘들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현재 대통령 정무특보를 맡고 있는 친박 핵심인 윤상현 특보와 김재원 특보는 ‘정무특보’ 무용론에 휩싸였다. ‘메르스 파문’에서 당·청 협력이나 국회법을 두고 청와대와 당이 갈등을 겪는 동안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국회법 당청갈등에 책임을 지고 지난달 사퇴했다. 여기에 친박계 일부 인사들이 K-Y라인에 줄을 서고 책임있는 친박계 인사들은 ‘나 몰라라’하고 있다.
서청원 구상은 청와대·내각 대폭 물갈이?
여권 안팎에서는 정권 3년차에 ‘친위 쿠데타’가 발생하는 게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까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서 최고위원은 같은 친박계인 이 비서실장, 최 부총리, 문 장관을 희생양으로 삼아 대대적인 친박 강경파로 인적 물갈이를 단행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서 최고는 박근혜 정권 방어차원에서 친박 결속력을 높이고 정권의 국정운영 동력도 회복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물론 내년 총선에서 ‘친박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공천물갈이’에 대한 우려감도 깔려 있다.
청와대 역시 내년 총선을 앞두고 내각 쇄신 필요성에 동감하는 분위기다. 총선 출마가 확실시되는 최 부총리와 황우여 교육부총리, 유기준 해수부 장관, 김희정 여성부 장관에 청와대 내 출마를 준비하는 비서관급 이상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 교체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내각과 청와대의 재정비와 이를 통해 박근혜 정부 중반 이후 국정운영 동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서 최고위원의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이런 ‘서청원 국정 동력 확보구상’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공석 중인 청와대 정무수석 자리에 중량감 있는 친박 인사가 들어와야 한다는 사고다. ‘7인회’ 멤버 중 한 명이나 최근 민화협 의장에서 사퇴한 홍사덕 전 의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럴 경우 윤상현·김재원 특보는 팔다리가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또한 내각은 공안통 황교안 총리체제를 통해 박 정권 중반을 안정적으로 이끌게 한다는 복안이다. 물론 서청원 구상이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국회법 개정’ 중재안이 무산되고 청와대가 거부권을 행세해 당과 ‘강대강’으로 갈 경우 서 대표의 구상은 그야말로 구상으로 멈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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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