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가‘살모사’키웠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철저한 경찰조직이 또 다시 항명사태로 흔들리고 있다. 일선 경찰서장이 군사령관급인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성과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동반 사퇴를 촉구해 파장이 일고 있다. 채수창(48) 서울 강북경찰서장은 지난달 28일 강북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채 서장은 이 자리에서 “조현오 서울청장은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한 뒤 자신도 사직하겠다고 밝혔다. 철옹성 같은 상부를 향해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경찰서장이 조직 내 2인자이자 직속상관인 서울지방청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항명 성격의 기자회견을 연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어서 위계질서가 엄격한 경찰 안팎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아울러 이로 인해 경찰조직에 개혁 칼바람이 불어 닥칠지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채 서장은 최근 문제가 된 양천서 가혹행위 사건과 관련, 경찰 지휘부에 책임론을 꺼내들며 직격탄을 날렸다.
채 서장은 “양천서 사건은 우선 가혹행위를 한 담당 경찰관의 잘못이 크겠지만 실적 경쟁에 매달리도록 분위기를 조장한 서울청 지휘부의 책임도 크다. 이런 조직문화를 만들어낸 데 근원적 책임이 있는 조 청장의 사퇴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채 서장은 “나도 경찰서장으로서 서울청 지휘부의 검거실적 강요에 휘둘리며 직원에게 무조건 실적을 요구해온 데 책임을 느낀다. 오늘 중에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채 서장의 주장에 따르면 실적 평가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검거 점수 실적으로 보직인사를 하는 등 오로지 검거에만 치중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채 서장은 “경찰은 법 집행기관이면서 동시에 인권 수호기관인데 현 지휘부가 들어오면서 실적에만 매달리게 됐다”며 “현행 실적평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양천서 사건 같은 문제가 또 발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찰대 1기로 졸업 후 경위로 임관, 2007년 전북 김제 경찰서장과 2008년 서울경찰청 지하철경찰대장, 경무과 총경을 거쳐 지난해부터 강북경찰서장직을 맡아온 채 서장은 그동안 지휘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시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채 서장과 강북서는 최근 4개월간 서울청의 실적 평가에서 꼴찌를 기록해 서울청의 집중감찰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채 서장은 회견에서 “상부에서 내 주변을 조사하고 내가 전화통화한 내역까지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히며 그동안의 심적 압박이 심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서울청은 채 서장의 무능을 지적하며,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맞대응하고 있다. 서울청에 따르면 최하위 실적을 기록한 경찰서의 수장이 자신의 무능을 덮기 위해 지휘부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청은 이날 배포한 `성과주의 취지 및 세부내용'이라는 제목의 설명 자료를 통해 채 서장의 주장을 반박했다.
서울청은 “양천서 사건은 인권의식이 모자란 극소수 직원의 잘못된 범죄행위이며, 성과주의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보는 시각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며 “성과주의 목적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치안만족도를 높이고 조직 내 활력을 불어넣는 순기능이 상당하며, 대다수의 현장 경찰관들이 법과 절차에 따라 인권을 준수하며 잘 해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청 주변에선 이번 항명 파문이 채 서장의 개인적인 감찰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도 들린다. 강북서가 올해 실적 평가에서 꼴찌 수준을 면하지 못한 데다 서울청의 집중 감찰을 받다 보니 쌓여 있던 불만을 참지 못하고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조 청장은 “성과주의 순위에서 꼴찌 했다고 해서 부담을 갖는다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정성평가에서 점수를 받는다”며 “하지만 채 서장은 문제가 있다. 업무에 신경을 안 쓴다. 감찰을 해도 4개월 연속 꼴찌 하는 것은 문제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와 함께 양 측의 정면충돌로 일선 경찰서 곳곳에서는 성과주의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경찰 내부에서 확산되고 있다.
서울청은 기자회견 직후 곧바로 성과주의의 취지를 설명하는 자료를 배포했다. 이 자료에서 서울청은 성과주의가 주기적 성과평가를 통해 나온 점수를 인사나 성과금에 반영하는 어느 조직에서든 없어서는 안 될 관리 기법이라고 밝혔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킴으로써 국민이 느끼는 치안만족도를 높이려고 공정한 평가를 통해 열심히 일한 사람이 보상받는 풍토를 조성한다는 게 이 제도의 핵심이다.
상당수 경찰서장들은 치안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추진된 실적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치안현장에서 뛰는 하위직 경찰관들의 시각은 경찰 지휘부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일선 경찰관들은 “성과주의는 현실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라고 입을 모은다. 성과주의 도입 이후 동료와 협력 수사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실적을 내야 하기 때문에 무분별한 단속과 실적경쟁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선 서장의 하극상 사태로 경찰대 출신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번 사태가 단순히 경찰대 1기 출신인 채수창 서울 강북서장의 개인 성향과 특수상황에 따른 돌출행동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1985년 이후 매년 120명씩 배출돼온 경찰대 출신은 25년이 흐른 지금 인사적으로 상층부 다수를 차지하는 조직 내 최대 파워그룹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서울의 일선서 31곳 중 경찰대 출신 서장은 17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그래서 채 서장의 수뇌부에 대한 불신과 하극상은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 의식과 집단적 파워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경찰대 출신의 파워그룹화와 이러한 의식구조 탓에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경찰대 출신 동문을 위한 ‘자폭 공격’이라는 해석마저 내놓고 있다. 채 서장이 조 청장과 경쟁관계에 있는 동기생을 밀어주기 위한 파워게임에 동원된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같은 해석에 대해 일선 경찰관들은 부정적이다. 이번 파문은 순전히 실적성과주의가 낳은 폐단이며 파워게임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밖에 채 전 시장은 지난 1일 오전 정복 차림으로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 출석, 6시간가량 감찰 조사를 받은 뒤 이날 오후 5시 30분쯤 귀가했다.
이미 사직서를 낸 상태에서 직위해제된 그는 조사가 끝난 뒤 “강희락 경찰청장에게 누를 끼쳐 죄송하다”며 “징계 절차를 빨리 내려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를 담당했던 감사관실 관계자는 “본인도 경찰 고위간부로서 (기자회견을 통해 의견을 표출한) 절차가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했다”며 “징계 절차에 수긍하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채 전 서장은 이날 조사에서 “혼자 고민하다가 기자회견을 결정했으며, 하극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하극상 여부를 정밀 판단한 뒤, 조만간 중앙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 여부와 수위를 결정할 계획이다. 현행 규정상 △파면 △해임 △강등 △정직이 중징계에 해당하며, 아직 경찰 내부에서 ‘강등’ 처벌을 받은 사례는 한 번도 없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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