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긴노 유리(황금백합)’ 일본군이 숨겨둔 보물찾는 보물사냥꾼 이야기

황금백합작전으로 부를 챙긴 일본과 미국은 이를 비밀에 부쳐야 했다. 때문에 양국은 철저하게 자국민을 속였다. 1951년에 체결된 일본과의 평화 조약은 이 사기에 의해 왜곡됐다.
일본은 갱단들에게 금과의 교환으로 마약을 공급하면서 중국을 마약으로 뒤덮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비밀 장소의 보물들이 드러났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장군, 부족 원로, 은행가, 사업가 등을 포함한 부유한 사람들을 협박하여 보물을 강탈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날 당시에는 거의 파산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한 일본의 많은 엘리트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그 전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되었으며, 일부는 항복하기 바로 전에 수십억 원의 재산을 모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예술품과 공예품은 일본의 개인금고나 도쿄의 황실 진열실에 있다.
미국이 점령초부터 맥아더 장군, 트루먼 대통령, 존 포스터 덜레스 그리고 소수 인사들이 전쟁 약탈과 전후에도 유지된 일본 엘리트들의 엄청난 부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50년 맥아더의 본부에서 작성된 공식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점이 드러난다.
“점령의 중대한 과제 중 하나는 엄청난 양의 금, 은, 귀금속, 외국 우표, 조각판, 각종 화폐를 수집하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 다량의 부를 모으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 둔 것은 일본 관리들이었지만, 신고되지 않은 이 보물들의 은닉처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맥아더와 참모들은 20억달러의 금괴가 도쿄만에 가라앉았다가 나중에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를 모른 척 했다.
일본의 산와은행에 비밀 트러스트가 개설되었고, 이것을 맥아더 장국과 히로히토 천황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히로히토의 연호에 따라 쇼와트러스트라 불리는 이 계좌는 1982년에 그 원그머에 대한 연이자만 거의 10억달러에 가까웠다.
종전 10년 후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연합해 일부 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필리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발굴이 이뤄졌다. 이를 주목한 미국의 광선전문가이자 야금화학자인 로버트 커티스는 25년간 수집하고 제작했다.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자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커티스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을 위해 테레서 2지구에서 약 80억 달러의 금괴를 발견했다. 그러나 마르코스에 의해 거의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보물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커티스는 마르코스를 위해 다섯 개의 주요 골든릴리 발굴을 감독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마닐라 만과 주변에 있던 많은 장소를 알게 됐다. 그는 이 덕택에 골든릴리 엔지니어들이 채용한 기법들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의 고위 정부 관료와 펜타곤 장군들은 존버치협회, 통일교 및 극우 거물들과 협력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적인 FBI와 군산 복합체를 만들어내는 데 골든릴리를 상용하려 했다. 이는 미 육군 퇴역 장성인 존 싱글러브와 레이건 대통령 하에서 국가안보회의 위원이었던 로버트 슈바이처 장군이 참석한 1987년 홍콩의 한 컨퍼런스 테이프 기록에 의해 확증된다.
거대한 군산복합체의 자금줄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보호아래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 항복 50주년에 즈음해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은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희생자들은 연합해 일본과 대항했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싸움이 캘리포니아 주 법정에서 행해졌다. 전쟁 이후 애매모호한 이유로 보상 청구 권리를 박탈당해온 생존 전쟁 포로, 노예노동자, 위안부, 민간인 희생자들은 이 법정 투쟁에서 수십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995년의 추산에 따르면 아직도 70만 명의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이 보상을 못 받고 있으며, 이 수치는 고령화·질병 때문에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활동가들과 법률회사들이 특별한 연대를 구성해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영국이 이 법적인 정보 공개의 흐름을 회피하기 위해 희생생자들에게 일회적이 보상을 하고 그들의 입을 닫으려 했다. 워싱턴은 캘리포니아 소송을 연방법원으로 이관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소송은 정치적 압력과 정부 기관들의 개입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국무성과 법무성은 1951년 평화조약의 제14조를 활용해 미츠비시, 미츠이, 스미모토 등 일본의 거대 기업들에 대한 전쟁 포로와 기타 희생자들의 소송을 막으려 했다. 결국 2000년 9월 21일 미국 연방지방법원 판사 본 워커는 미국 전쟁 포로와 기타 노예노동자들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오늘날 도쿄와 워싱턴 사이에는 의회 청문회와 미 의회의 조사를 받기에 충분한 모종의 결탁관계가 존재한다.
심지어 미국의 주일 대사였던 토마스 폴리는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전범기업 미츠비시의 자문역이자 로비스트 계약에 서명했다. 또 주일 부대사였던 크리스토퍼 라플루는 전직 수상이자 재무대신이었으며 존 포스터 덜레스와 1951년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해 비밀 협상을 한 세명의 일본인 중 한사람인 미야자와 딸과 결혼했다.
골든릴리의 출발점은 한국
바탕가 주의 마닐라에서 해변 쪽으로 내려가면 인상적인 보물 매장지가 있다. 이곳은 최근 수년 동안 많은 일본인들이 발굴하려고 애써왔던 장소였다. 이 지하 요새는 1920년대 초 필리핀을 정복하려는 일본의 장기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1944년에는 보물로 채워졌다. 이 터널 중 세 군데가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됐다. 하지만 더 깊은 곳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다. 과연 이 엄청난 양의 보물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모두 한국에서 시작됐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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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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