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에 씌워진 ‘산소마스크’가 수상하다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영화 ‘데스노트’의 한 장면 같은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 다른 점은 노트에 이름을 적힌 사람은 살아남고 적은 이는 목숨을 잃어 정반대의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지난 13일 밤 8시께 광주시 동구 용산동 체육공원 옆길에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서모(26) 여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특이한 것은 서 여인의 얼굴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으며 그의 가방에서 ‘살인 계획서’가 나왔다는 점이다.
서 여인이 살해하려던 사람은 중년의 남성 S씨(41), 숨진 당일 함께 술을 마셨으며 그는 시신을 맨 처음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의문의 산소마스크와 ‘살인 계획서’를 남긴 서 여인. 미궁으로 빠져든 그날 밤, 서 여인과 S씨 사이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사건과 관련해 가장 미심쩍은 인물은 바로 S씨다. 그는 서 여인이 생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었고, 서 여인은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터다. 그러나 S씨는 자신에게 쏠리는 의혹을 모두 부인하고 있다.
서 여인 ‘살인계획서’ 내용은
S씨는 경찰 조사에서 “서씨와 함께 차 안에서 잠을 자던 중 혼자 사우나에 다녀왔다”며 “돌아와 보니 서씨가 숨져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잠든 여자를 혼자 차 안에 두고 사우나에 갔다는 점이나 산소마스크가 씌워진 시신의 상태 등은 미심쩍기 그지 없다.
경찰은 서 여인의 가방에서 발견된 살해 계획서에 주목하고 있다. 주도면밀하게 S씨의 살해를 계획한 서 여인은 그를 죽여 2억5000만 원의 보험금을 타 낼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씨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12장의 문서에는 ‘동업자 S씨에게 수면제가 든 요구르트를 마시게 한 뒤 차량에 히터를 틀어놓고 드라이아이스를 나둬 질식사시킨다’ ‘차량 문을 열리지 않게 한다. 실패하면 비닐 랩을 씌워 죽인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 ‘S씨가 죽으면 그의 명의로 가입한 두 개의 생명보험금 2억5000만 원이 지급돼 (그에게)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다. (나는)질식사를 피해 산소마스크를 쓰자’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서 여인이 쓴 산소마스크에 연결된 산소통은 텅 비어 있었으며 시신에는 특별한 외상이 없었다. 경찰은 서 여인의 사인을 질식사로 보고 있다. 시신이 발견된 승용차의 뒷좌석 바닥에는 빈 산소통 1개와 사용하지 않은 새 산소통 8개, 이산화탄소 소화기 등도 발견됐으며 비닐 랩도 있었다. 적어도 서 여인의 살인 계획서에 등장하는 준비물은 모두 갖춰진 셈이다.
S씨의 진술도 서 여인이 계획에 따라 살인을 도모했다는 데 무게를 싣는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서 여인이 함께 술을 마시면서 요구르트 1개를 권해 마셨고 잠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S씨, 서 여인 속셈 미리 알았나
그러나 서 여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경찰은 S씨를 살해하기 위해 서 여인이 계획을 진행하던 중, 차 안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잠이 들었고, 실수로 용량이 적은 산소통을 연결했다 질식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S씨가 미리 서 여인의 의도를 알고 먼저 그를 살해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만약 서 여인이 정말 S씨를 죽이려했다면 깊게 잠이 들만큼 과음을 했을 리 없다는 게 중론이다.
또한 산소통을 9개나 준비해 놓고 일부러 용량이 적은 산소통을 골라 연결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살인을 저지르기로 한날 모든 정황을 상세히 적은 계획서를 갖고 다녔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서 여인의 타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정황은 바로 최초 발견자인 S씨의 행적이다.
그는 잠든 서 여인을 차 안에 남겨두고 혼자 사우나에 다녀왔다고 진술했다. 더구나 호흡곤란을 느낀 상황에서 서 여인을 방치한 채 자기만 빠져나왔다는 것도 미심쩍다.
S씨는 “한순간 숨이 막히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승용차 운전석이었고, 한번 토하고 나서 운전석 문이 열리지 않아 조수석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사우나에 갈 당시 서 여인이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전석에 열쇠가 꽂혀 있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S씨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물론 발견 당시 서 여인이 엎드려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S씨가 서 여인의 산소마스크 착용 여부를 못 봤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서 여인의 몸에 특별한 외상이 없다는 점에서 타살 징후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찰은 서 여인의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정밀 부검을 의뢰한 상태다. 하지만 부검 결과가 나오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여 사건의 진실이 명확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서 여인의 죽음과 관련해 발견된 살인 계획서가 정말 서 여인이 작성한 것인지 여부도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문제의 계획서는 컴퓨터로 작성돼 군데군데 볼펜으로 수정된 부분이 있다. 만약 글씨가 서 여인의 친필이라면 의혹은 상당부분 해결된다.
그러나 경찰은 아직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한 상황이다. 수사팀은 문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은 물론 사건과 관련된 모든 정황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 중이다.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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