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수사반장’ 최중락 불굴의 투병기

“난 암도 이긴 오뚝이, 그깟 풍 쯤이야”
유난히 쌀쌀했던 3월의 첫 출근 날 아침, 낯익은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떴다. ‘59년차 베테랑 형사’ 최중락(82·에스원 상임고문) 총경이었다. “할아버지가 며칠 전에 풍을 맞아 누워있단다.”
‘리얼스토리 수사반장’ 시리즈의 첫 주인공이기도 했던 그는 손녀뻘인 기자에게 입원 소식을 알리면서도 멋쩍은 눈치였다. 병명은 뇌경색, 일명 ‘풍’을 맞았다고 했다. 입원직후 폐렴 증세까지 겹쳐 큰 고비를 넘겼음에도 최중락 총경은 온전하지 않은 발음으로 연신 “초라한 모습 보여 미안하다”며 힘들게 웃어보였다.
병세를 고려해 짧은 안부만 건네고 병원을 나선 지 두 달여 만에, 투병 중인 그를 다시 찾았다. 다행히 많이 호전된 모습에 거동도 가능한 상태였다.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최 총경의 눈빛엔 과거의 생기와 의지가 다시 빛나고 있었다. 경찰계의 ‘큰 어른’이자 두 차례의 항암치료도 이겨낸 만큼 ‘오뚝이’라는 그의 별명은 아깝지 않았다.
최중락 총경은 지난달 9일 뇌혈관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D한방병원으로 병실을 옮겼다. 10평 쯤 되는 개인병실에는 강희락 경찰청장을 비롯한 각계와 배우 최불암 등 연예계 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그득했다.
“故 배삼룡 때문에 15년 만에 폭음”
“입원한 두 달 동안 손님이 2000명은 다녀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떠는 최 총경의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닌 듯 했다. 간호사 출신으로 병수발을 드는 며느리 정승애씨는 “한동안 손님들이 병실 밖에서 ‘번호표’ 들고 대기했을 정도”라며 거들었다. 그만큼 그의 인품과 인맥이 빛을 발했다는 얘기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그놈의 술이 원수”라는 답이 돌아왔다. 의외였다. 15년 전 림프종(임파선암) 판정을 받은 뒤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그였다.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대답은 짧았다. “전날 배삼룡의 장례식에 갔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24일 투병 끝에 숨진 코미디언 배삼룡은 최 총경의 오랜 지인이었다. 말년이 고단했던 그에게 남몰래 마음을 썼던 게 한 두 번이 아닌 탓에 최 총경은 고인의 죽음이 더욱 서글펐다고 했다.
“배삼룡이 세상 뜬 날 말이야. 상가에 가서 송해, 남보원과 술을 퍼 마셨어. 소주 한 말은 더 먹었지. 한 박스는 넘었을 거야.”
상가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인 2월 27일 최 총경은 은평구 신사동 자택 침대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그를 깨우러 들어간 며느리 정씨 덕분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간호사 출신인 며느리가 왼쪽으로 입이 잔뜩 뒤틀린 시아버지의 손가락을 따는 등 응급조치를 했고 서둘러 119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MRI 촬영 결과 우측 중뇌부의 혈관이 막혀 초승달 모양의 뇌경색이 일어났다고 했다. 현재는 돌아갔던 입도 제자리를 찾았고 어느 정도 거동도 가능한 상태다.
팔순을 넘겨 풍을 맞았지만 최 총경과 가족들은 그의 쾌유를 의심하지 않는다. 현역시절 피 튀기는 범죄현장을 수십 년 넘게 누볐고 이미 세 번이나 치명적인 병마를 이겨낸 까닭이다.
1994년 11월 림프종 판정을 받은 그는 5개월간의 항암치료로 위기를 넘겼다.
꼬박 10년 만인 2004년 암이 재발했지만 이 역시도 꿋꿋이 버텼다. 2006년 6월에는 지인의 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될 뻔 했음에도 수술을 받고 곧 일어섰다.
경찰史 ‘형사 최중락’의 무게
대한민국 강력수사계에서 ‘최중락’이라는 이름은 특별하다. 1950년 친형과 함께 경찰에 투신한 그는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계 근무를 시작으로 서울시경 강력계장, 인천시경 수사과장, 서울시경 형사과장을 거치며 37년 동안 베테랑 수사경찰로 명성을 날렸다. ‘대도’ 조세형을 감화시킨 정신적 지주로도 유명하다.
“범인 잡는 게 천직”이라는 그는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매일 같이 범죄 현장을 누볐다. 투병 직전까지 그는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경찰청 형사당직실로 출근을 했다.
밤사이 터진 사건사고들을 쭉 훑어보며 수사의 ‘감’을 잡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병실에 누운 지금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과거 기자와 인터뷰를 나눌 때 최 총경은 이렇게 말했다.
“사건 개요만 보면 어느 정도 느낌이 와. 그 직감을 후배들한테 귀띔해 주는 게 선배잖아.”
1950년대~1990년대 초까지 수도권 지역에서 벌어진 강력 사건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최 총경이 현역 시절 잡아들인 범죄자만 1300여명, 직접 검안한 시신도 2600여구에 달한다.
1959년 필동 일가족 몰살사건부터 66년 상업은행 강도사건, 76년 육일사전당포 살인사건, 84년 을지병원 독살사건 등 굵직굵직한 강력사건의 해결사로 맹활약하던 그는 정년을 9개월 앞둔 1990년 구로동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을 진두지휘하며 절정의 수사 감각을 뽐냈다.
최 총경의 화려한 경력은 100여개에 달하는 훈장과 포장, 최고의 검거실적을 올린 형사에게만 주어지는 ‘포도왕’이라는 지칭이 말해준다.
하지만 ‘형사 최중락’을 유명인 반열에 올려준 것은 역시 드라마 ‘수사반장’이다.
한국 최초의 수사물을 만드는 과정은 험난했다. 수사극을 만들어본 연출가도, 대본을 써본 작가도 없었던 것. 결국 방송사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가장 많은 검거실적을 올린 최중락 형사가 직접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무조건 실제처럼”을 외치는 최 총경 때문에 연출자와 스태프는 모조리 경찰학교 교육장에 내던져졌고 작가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전부 최 총경을 비롯한 형사들이 실제 해결한 사건들인 까닭이다. 배우 캐스팅부터 현장 지휘까지 최 전 총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20년 전 종영한 드라마 관계자들과 ‘반장네 식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든 최 총경은 지난 9월 왕년의 ‘수사반장’ 멤버들이 모인 친목회 자리에 본지 취재진을 초대하기도 했다.
직접 경찰청을 돌며 현장을 챙기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향한 관심은 여전하다. 매일 2~3가지 일간지를 꼼꼼히 정독하고 재직 중인 에스원의 업무보고도 놓치지 않는다. 최근 그는 신문에 실린 한 이름 모를 경찰 후배를 위해 힘든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한 강력계 형사가 무속인에게 속아 거액을 뜯긴 뒤 비관 자살한 사건이었다. 본인의 과오였지만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에 그는 당장 조화를 보냈다. 뛰어난 수사실적을 올린 후배들을 일일이 찾아가 회식비라도 건네주는 게 유일한 낙인 최 총경은 이렇게 말했다.
“강력계 형사는 의리가 생명이야. 험한 일, 궂은 일만 도맡아 하는데 선배들이 잘 챙겨줘야지.”
이름 모를 후배 형사에 弔花
2006년 서울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 당시 뛰어난 감식수사로 명성을 날린 방배경찰서 김갑식 경정에게 축하 선물을 보낸 일, 지난해 4월 연쇄살인범 강호순을 검거한 안산경찰서 수사팀을 직접 만나 금일봉을 쥐어준 것 등은 언론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언제쯤 사무실에서 뵐 수 있느냐’는 질문에 최 총경은 “아직 보름은 더 있어야 한다더라”며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수사관 은퇴 뒤에도 19년 동안 굴지의 보안업체 일원으로 강의를 이어갔던 ‘최중락 형사’에게 병실은 너무도 좁아보였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pot.co.kr
이수영 기자 ro@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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