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기자의 현장르포[4] 영등포 사창가
김수정 기자의 현장르포[4] 영등포 사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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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04-27 09:21
  • 승인 2010.04.27 09:21
  • 호수 835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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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숲에 갇힌 성(性)“70년대 누이가 울고있다”

영등포역 집창촌의 역사는 깊다. 1940년대 일제 말기에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올해로 7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지난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이후로 된서리를 맞으면서, 현재 20여 곳만 남아 영업을 하고 있다. 최근 주변에 ‘대딸방’‘유리방’‘이미지클럽’ 등 불법 변태업소들이 늘면서 집장촌의 불황이 더욱 가중됐다. 설상가상 재개발까지 추진되면서 집창촌 사람들은 대책 없이 밀려나고 있다. 7~80년대 산업화 사회가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공장을 찾아왔던, 이른바 공돌이들의 성 해방구였던 ‘영등포 집장촌’의 역사를 찾아가 본다.

2010년 4월 22일 오후 8시 50분. 지하철 창문 밖으로 구슬프게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 도착하자 스산한 봄바람이 온 몸을 감쌌다. 지하도로 2번 출구를 향했다.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에는 7명의 노숙자들이 만취해 그들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 옆에는 산산조각으로 깨져 있는 소주병과 흘러나온 소주가 바닥을 적셨다.

계단을 따라 나와 영등포역 밖으로 나갔다. 흡사 지난달 방문했던 수원역의 풍경과 비슷했다. 현란한 네온사인 속 정신없이 울려대는 차 소리, 음악소리, 사람소리에 혼미해져간다.

2번 출구로 나와 앞으로 50m쯤 가면 좌측에 백화점 주차장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또 50m쯤 가면 영등포 집창촌의 분홍색 불빛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한눈에도 문을 연 업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재 영등포에는 단 20여 곳만이 홍등을 켜고 있다.

일종의 마을 형태를 띠었던 미아리, 천호동 집창촌과는 달리 영등포는 10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 위에 덩그러니 몇몇 업소만이 영업 중이다.

넥타이 부대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집창촌 입구에 늘어선 포장마차로 들어가 한잔 술과 함께 회포를 풀었다. 얼마 후 포장마차에서 나온 그들은 으레 집창촌을 걸어 다니며 묘한 웃음을 띤 채 여성들을 훑는다. 그러나 모두 지나갈 뿐 들어가지 않는다. 단속의 위험 때문이다. 손님들 역시 성매매특별법 이후로 CCTV로 무장해 단속을 피하는 안마방이나 유리방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그나마 불법인 점을 이용해 버젓이 성행위를 하고 돈을 내놓으라는 ‘진상 손님’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성매매특별법 시행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신종 불법 성매매로 인해 영등포 집창촌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영등포에서만 홀복 장사를 13년간 해왔다는 60대 A씨는 “한 때는 이 장사로 월 2000만 원까지도 벌었다”며 “요새는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어 아가씨들도 옷을 잘 안 산다”고 말했다. 용산 집창촌에서도 홀복을 팔고 있는 A씨는 “25년을 넘게 이 일만 했는데 지금처럼 장사가 안 되면 아마 더는 이 장사 못할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과 함께 유리창 안에서 하염없이 담배를 피는 성매매 여성들의 숱한 한숨들이 4월 영등포 밤하늘에 엉키고 있었다.


“손님과 사귀기도 하나 남는 건 상처 뿐”

오후 9시 30분이 넘자 본격적인 아가씨들의 유혹이 시작된다. 특히 영등포 집창촌 성매매 여성들은 굉장히 쾌활한 분위기였다. 그만큼 이곳 여성들에게는 별다른 규율이나 제재가 없다. 출퇴근도 자유롭고, 의상 및 손님을 고르는 것도 모두 여성들의 선택에 달렸다. 그 때문인지 유독 여성들의 의상 스타일이 다양했다. 교복을 입은 아가씨가 있는가 하면, 수영복에 가까운 의상을 입은 여성도 있고, 섹시한 카우보이 스타일로 차려입은 아가씨도 있었다.

연령대도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고루 분포됐다.

특이한 점은 영등포 집창촌은 수원역 그곳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가 있다.

소위 ‘팸프’라고 불리는 퇴물급 매춘 여성들이 이곳 주변에서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수원과 다른 점이라면 ‘팸프’의 경우 받는 돈이 정해져 있지 않을뿐더러 팸프가 아니더라도 외국인 손님을 젊은 여성들이 받는 다는 것이다.

한 업주는 “팸프들 불쌍하죠. 대개 30분에 3만 원 정도 받는다는데 대중없어요. 손님 없을 땐 1만 원에도 하고 그래요”라며 혀를 찼다.

‘팸프’들은 주로 집창촌 입구 앞이나 영등포 역 주변에 숨어서 근근이 성매매를 하고 있다.

어느덧 오후 10시가 넘었다. 영등포 집창촌에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걸어 다니기 시작한다.

비가 온 탓인지 걷는 손님보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아가씨들을 구경하는 손님이 더욱 많았다. “오빠 잘해줄게. 들어와”라는 아가씨들의 손길이 더 바빠졌다.

한 시간 동안 기다려봤지만 마땅히 들어가는 손님이 없다. 이렇게 매일 밤 10시간씩 20cm높이의 신발을 신고 서 있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 꿈을 위해 오늘도 그녀들이 웃음을 팔고 있다.

잠시 후 기자는 한 집창촌 여성과 제법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18살부터 10년간 전국에서 매춘을 해 왔다는 B씨는 긴 청바지에 하얀 슬리브 상의를 입고 있었다. 군살하나 없는 몸매에 큰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전라도 아가씨였다.

호주에서도 5개월간 성매매를 했다는 그는 그야말로 이 업계 베테랑이었다.

“호주에 간 이유는 다른 거 없어요. 거긴 합법이거든. 참, 그건 있다. 거긴 법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걸리지 성매매 자체는 문제 없더라고. 그래도 타국에서 사는 게 퍽 외로워요.”

성매매특별법이 터지기 전까지 한때는 그의 월수입은 2000만원이 넘었다고. 벌어놓은 돈도 꽤 된다고 한다. 30살 이후에 애견미용사를 꿈꾸며 지금껏 허튼 돈 한번 쓰지 않았다며 야무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B씨는 “새로 들어오는 애기들 보면 딱 두 가지 생각이 들어요. 정말 순박한 애들 보면 진짜 하지 말라고 진심으로 막고 싶기도 하고, 반대로 까진 애들은 ‘그래 젊었을 때 돈이나 바짝 벌어라’ 이렇게요. 그래도 보면 다들 가엾고, 말리고 싶죠”라며 깊게 담배 한 모금을 빨아 드렸다.

한 없이 쿨 할 것 같은 B씨지만 사실 그에겐 남모르는 슬픔도 많다. 평생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할 뿐더러 사랑하는 사람과 진심을 나누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가끔 손님이랑 사귄 적도 있어요. 글쎄, 참 묘한 사이죠. 사랑하지만 결국 늘 결과는 상처뿐이에요. 누가 자기 여자가 이런 일 하는 거 좋아할까. 그래서 이제는 정말 사랑하면 그냥 숨겨요. 이젠 누굴 진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건냈다.

실제로 예전에 소위 ‘기둥서방’이라고 알려진 삼촌들 역시 대개 집창촌 여성들의 애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업주는 “언론에서는 아가씨들하고 같이 사니까 그렇게들 표현했는데 왜곡된 것”이라며 “다들 손님으로 왔다가 아가씨들이랑 정분나서 같이 살게 된 남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30분 간 B씨와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 내내 웃으며 기자의 질문에 대답만 해줬던 그가 돌연 기자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근데 기자 분은 기자가 정말 좋아서 하나요?” 기자는 이런 저런 대답대신 “나중에 꼭 애견미용실 차려서 초대해 달라”고 하자 B씨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요즘 집창촌 아가씨들은 말한다. “살기 위해 이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꿈을 위해 이 일을 선택했다”고.


영등포 7~80년대 화려했다

영등포 집창촌은 7~80년대 가장 전성기였다. 당시 서울에 직장을 구하러 올라온 시골청년들이 영등포 인근인 문래동을 비롯해 구로동에서 일했다. 영등포 역 집창촌은 그들의 성 해방구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인기를 끌었다.

집창촌 인근에서 담배가게를 하는 C씨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C씨는 “옛날 화려할 땐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들도 몰래 찾아와 즐기고 갔다”면서 “지난 80년대 인가 황태자 D씨가 여기 있는 여자와 마약을 하고 섹스파티를 즐기다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엔 고급 승용차를 끌고 와서 여자들과 섹스를 즐기고 갔다. 우리는 설마 그가 D씨라는 생각은 못했다. 나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에 난 뒤 그가 D씨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B씨와의 대화를 마치고 영등포 한터위원회 H 대표를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업소 안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5평 남짓한 불 꺼진 방 안에 작은 싱글 침대와 군데군데 스탠드 불빛이 켜져 있었다.

6년부터 집창촌에 들어왔다는 그는 영등포 토박이였다. H 대표는 “40년 전 영등포 역 바로 앞에 집창촌이 있었을 때는 길가다가 그냥 잡혀 들어가서 맞고 돈 뺐겼어요”라며 “지금 생각하면 참 문제가 많았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는 “저도 이 일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근데 아시다시피 여기 업주들 대개 다 못 배우고 전과도 많은 사람들이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더군요. 저도 막노동으로 돌고 돌아 이곳으로 왔어요”라며 지난 날을 회상했다.


“결국 선택은 변종 성매매 뿐”

그의 말에 따르면 영등포 집창촌의 남은 업주들 모두 빚만 남은 영세민이라고 한다.

그는 “‘탕’도 수십 번 맞고, 단속이다 뭐다. 진짜 남은 게 없어요. 여기 철거되면 보상도 보상이지만 그저 빚만이라도 다 갚는 게 소원”이라고 호소했다.

H 대표 외에 이곳에 남은 업주들 대개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면 결국 이와 비슷한 일을 할 것이라고 한다.

H 대표는 “배운 게 이것뿐인데 어떡하겠습니까. 저희도 살고 싶습니다. 성매매 특별법이 더 많은 범죄자를 양산하지나 말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토로했다.

어느덧 부슬부슬 내렸던 봄비가 점점 더 굵어졌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처럼 이곳 영등포 집창촌 거리도 처량한 불빛만 뿜어내고 있다.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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