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에게 항의·폭행… 응급실 천태만상
의료진에게 항의·폭행… 응급실 천태만상
  • 이지혜 기자
  • 입력 2015-05-11 09:38
  • 승인 2015.05.11 09:38
  • 호수 1097
  • 3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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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사람 버려두고 산 사람부터 치료하쇼"

▲ 뉴시스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생과 사가 넘나드는 병원 응급실에서 본인만 생각하는 환자들의 이기심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심폐소생술을 하는 긴박한 순간에 “곧 죽을 사람 놓아두고 나부터 치료해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응급실인 만큼 의료진들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일부 환자들은 오히려 병원 측에 항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응급실 간호사는 “이기적인 보호자들 때문에 슬퍼질 때가 많다”고 말한다.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사 넘나드는 CPR 환자 옆에서 “곧 죽겠네” 비아냥거려
보호자들 “아파서 찾은 응급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지난해 11월 심한 복통으로 경기도 안산의 어느 응급실을 찾은 나모(26·여)씨. 나 씨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씨는 배가 무척 아팠지만 상태가 위중한 환자들을 보고 얌전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응급차 사이렌 소리와 함께 보기에도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실려 왔다.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것이다. 응급실 의료진들은 새로 들어온 환자에게 몰려갔다. 그 뒤로 환자의 부모도 따라 들어왔다. 의료진들은 교통사고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 40대 남성이 의료진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그 사람보다 먼저 왔다. 나부터 치료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간호사가 남성에게 다가가 “이 분이 더 위중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남성은 “딱 보니 죽을 사람인데 산 사람부터 치료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큰소리를 쳤다. 이 모습을 지켜본 나 씨는 “나도 무척 아팠지만 더 위중해 보이는 환자이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라며 “남성의 이기적인 발언에 응급실 환자들이 모두 놀랐다. 정말 눈살이 찌푸려졌다”고 말했다.

“우리 아기가 열이 난다”
응급환자 옆에 두고 항의

서울의 상급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간호사 A씨는 이기적인 환자들을 자주 목격했다고 말했다. 아픈 환자들이 모인 응급실의 성격을 생각하면 환자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씁쓸하다고 했다. A씨는 “응급실은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래서 1분1초가 중요한 곳”이라며 “그러나 일부 보호자들이 응급환자를 뒤로 한 채 자신들을 먼저 챙겨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속상하다.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A씨는 “몇 달 전 응급실에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환자가 온 적이 있다. 1분이라도 빨리 위세척을 실시해야 했다. 준비하고 있는데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찾아와 자신의 아이부터 봐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 보호자는 아이(3)가 열이 난다며 급히 응급실을 찾았다. 그러나 먼저 온 아이를 뒤로 한 채 다른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에게 항의를 한 것이다.

A씨는 “응급환자의 상태가 위중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이 환자가 지금 죽어간다고 말했지만 그 보호자분은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우리에게 욕설을 하며 ‘우리 아기가 더 응급환자’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A씨는 “이런 경우를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자신의 아이만 생각할 수 있는지 너무 서글펐다”고 말했다. 응급실에서 일부 보호자들의 이기적인 행동에 회의감을 느낀 A씨는 현재 개인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지난 3월 충남의 어느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은 지모(29·여)씨도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당시 지 씨는 어머니(53)가 식중독 증세를 보여 새벽에 응급실을 찾았다. 대기 환자가 적었던 덕분에 지 씨의 어머니는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수액을 맞고 있는 어머니 옆을 지키던 지 씨는 “인터넷에서 글로만 보던 진상 보호자를 봤다”고 말했다.

지 씨는 “교통사고를 당한 중상자가 실려와 의료진이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들어온 중년 남성이 의사에게 ‘여기 아픈 환자가 있으니 빨리 봐달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성과 함께 들어온 중년 여성은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응급환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남성은 계속해서 의사에게 소리를 질렀다”면서 “간호사가 기다려 달라고 말하자 주변 물건을 집어던지고 의료진에게 심한 욕설을 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다”고 말했다.

“언어·신체 폭력 경험
신변 위협 느끼기도”

응급실 현직 간호사 B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응급실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가장 어려울 때 방문하는 곳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이 가장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씨는 “응급실은 응급환자 중증도에 따라서 긴급을 요하는 환자부터 진료하게 돼 있다. 또 중환자가 발생하면 현재 진료 중이던 일부 의료진까지 심폐소생술에 합류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면서 “응급실에 이런 진료 절차의 설명문이 곳곳에 게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응급실에서 폭행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지난 3월 제주에서 40대 남성이 병원 직원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또 지난해 11월 광주광역시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는 4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병원 안전요원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B씨는 “응급실 의료진과 직원들은 모두 언어·신체 폭력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국내 보고에 따르면 언어폭력은 주 2~4차례, 신체폭력은 월 1차례 정도로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손이나 발로 위력을 행사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주로 응급실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환자는 경증 환자나 경증 환자의 보호자, 그리고 남성분들”이라면서 “대기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마냥 대기할 수 없다”
보호자의 항변

그러나 응급실에서 의료진에게 항의를 하는 보호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모(35)씨는 지난해 응급실을 찾았다. 아버지(62)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차례를 기다리며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의료진은 오지 않았다. 정 씨는 “아버지는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처음 응급실에 들어올 때는 그래도 걸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대로 말씀도 못하실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의료진이 정 씨의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들은 정 씨에게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묻고 이것저것 체크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응급환자가 들어왔고 정 씨의 아버지를 진료하던 의사까지 응급환자에게 달려갔다. 정 씨는 “아버지의 상태가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너무 걱정됐다. 연세도 많으신데 이러다 잘못되지 않을까 불안했다”며 “한 명 정도는 우리 아버지를 진료해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의료진에게 이미 오랫동안 기다렸다며 잘못되면 책임질 것이냐고 강하게 항의했다. 정 씨는 “아버지는 진료를 받고 괜찮아지셨지만 당시에는 너무 불안했다. 무엇 때문에 아픈 것인지만 말해줬어도 의료진에게 항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마 다른 보호자들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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