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기자의 현장르포 미아리 텍사스촌 탐방 ①
김수정 기자의 현장르포 미아리 텍사스촌 탐방 ①
  • 김수정 기자
  • 입력 2010-03-30 09:59
  • 승인 2010.03.30 09:59
  • 호수 831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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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걸, 성인영화 출연으로 생계 꾸려”

한때 대한민국 홍등가의 고유명사로까지 불렸던 ‘미아리 텍사스촌’ 주말이면 국내 외 손님들이 줄을 서서 지나가던 곳이 1년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2004년 9월 23일 성매매특별법을 시작으로 쇠락해가던 텍사스촌은 몇 년 새 경기불황까지 겹쳐 현재 예전 점포의 3분의 1밖에 남지 않았다.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불법 안마시술소와 강남 오피스텔촌에 줄줄이 손님을 빼앗긴 텍사스촌 사람들은 대부분 갈 곳 없는 영세민들이다. 남아있는 업소 마담과 아가씨들 역시 황망한 삶의 문턱에서 기약 없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텍사스촌의 최종 철거까지 남은 시간은 1년. ‘이제 미아리는 죽었다’고 체념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하루를 들여다봤다.

유독 추웠던 3월 셋째 주 수요일 저녁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을 부여잡듯 눈발은 점차 거세졌고, 이런 날 집창촌에 손님이 오기나 할까 싶을 만큼 지독히 매서운 날씨였다.

걱정 반, 귀찮은 마음 반으로 업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영업합니까?” 대답은 명료했다. “당연히 하죠. 여기야말로 일 년 내내 영업합니다.”


“숨기지 않는 것이 죄라면 죄”

저녁 8시. 길음역에 도착하자마자 도로변 상인들에게 텍사스촌 위치를 물어봤다. 스산한 저녁 20대 아가씨의 당돌한 질문에 짐짓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모두 한 곳을 가리켰다. 길음역 10번 출구. 그리고 기자에게 한 마디씩 거든다.

“거기 아직도 영업한답니까? 요새도 텍사스촌 찾는 사람이 있긴 한가 보네.”

“경기도 좋고, 텍사스 잘 나갈 때는 솔직히 우리도 덕 좀 봤는데 지금은 다 죽었어. 성매매특별법이다 재개발이다 해봤자 돈 있고, 땅 있는 사람들만 좋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예전 텍사스 시절이 훨씬 살 만했어”라며 시린 입김을 깊게 내뱉는다.

상인들의 말대로 길음역 10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세평 남짓한 하늘색 컨테이너 박스가 놓여 있었다.

노란색 바탕에 ‘청소년 출입금지구역 감시초소’란 큼지막한 빨간 글씨가 박힌 표지판이 미아리 텍사스촌의 간판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흡사 뉴욕의 허름한 차이나타운 골목처럼 굵직한 실타래 발이 촘촘히 내려져 있다. 그 발을 넘어서는 순간 ‘미아리 텍사스촌’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직 개장을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던 탓에 미아리 골목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좁고 제멋대로 뻗어 있는 골목에는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는 마담 몇 명만 덩그러니 가게 앞에 불을 켜고 앉아 있을 뿐이다. 새빨간 홍등 불빛을 기대했던 기자에게 미아리의 초저녁은 죽은 도시처럼 깜깜하고, 고요했다.

두서없이 길을 더듬는 기자를 쳐다보던 마담들의 눈빛이 묘했다. “아가씨 무슨 일로 왔어?” 사정을 얘기하자 업주 대표가 있는 곳을 설명해줬다. 업주들이 모여 있는 곳은 ‘정화위원회’라는 지하 회관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40, 50대 남자 업주들이 자유롭게 각자 일을 보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유태봉 대표를 만났다. 텍사스촌에서만 20년을 지냈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호소했다.

“저나 업주들 모두 빚 안 지면 다행이죠. 진짜 딱 죽을 맛입니다.”

옆에 있던 업주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성매매특별법 때문에 시간당 50만 원 넘게 받는 강남 오피스텔촌이나 무허가 변태 안마시술소만 더 늘어났지 뭐. 우리도 돈만 있었으면 여기 벌써 떠났어.”

“성매매 억제한다고 내놓은 법이 남자들 놀 곳만 더 만든 거야. 그 덕에 여기 업소들만 망했어. 한때는 정부 쪽에서 관광 사업으로 여기 앞에 버스 정류장까지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이제는 나가라고 난리니. 보상이나 제대로 해줄까 몰라.”

그의 말대로 미아리 텍사스촌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였다.

미아리에서 23살부터 자리를 텄다는 A씨는 “주중에도 일본 관광차가 들어왔었어. 지금은 마사지 업소로 다 가버렸지. 내가 성매매 법 터지자마자 일본에 가서 이 일을 한 것도 그때 알아 놓은 인맥 덕이거든”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A씨 말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집창촌 출신 업주들과 여성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

“여기서 일했던 여자애들 일본 가서 똑같은 일 하지 뭐. 돈은 그럭저럭 벌만 해. 돈이 급한 애들은 가끔 AV(성인용 포르노 영화)도 편당 1000~2000만 원씩 줘서 찍고 그러지. 그래도 결국은 다들 여기로 돌아와. 사람이 돈만 번다고 사는 게 아니잖아. 걔들한테 여기가 고향이고 집이니까” 라며 A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미아리에 남아있는 성매매 업소는 130여 곳이다. 하루 매출도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 빚더미에 놓인 업주들은 이곳을 떠나고 있다.

유 대표는 “업주들만 봉인 셈이죠. 장사 안 돼서 빚은 쌓이고, 아가씨들 임금은 예전보다 더 많이 줘야 돼요. 요새 아가씨들은 자기주장도 강하고, 툭하면 나가버리거든요. 특히 미아리는 유일하게 기둥서방도 없어요. 언론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가씨한테 막 대하는 거, 다 옛말입니다. 오히려 업주들이 아가씨들 눈치 봐요.”

유 대표의 말대로 미아리에는 소위 아가씨들을 관리하는 ‘기둥서방’이 없다. 예전처럼 업소에서 숙식하는 일도 거의 없을뿐더러 대개 자취방을 얻어 출퇴근하고 있다.

한 업주는 “솔직히 옛날에는 여자애들이 참 착했어. 물론 강압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가씨들이 학력도 높아지고, 생각 자체가 달라서 잘못했다간 오히려 업주가 ‘탕’맞아.”

‘탕’이란 이쪽 업계에서 소위 ‘사기 맞았다’는 은어이다. 인력 업체 중개인과 아가씨가 미리 짜고 소개비를 받고서 도망가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이유로 요즘 미아리 내 ‘선불 고용’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2004년부터 줄곧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성매매 여성들의 생계문제는 어떨까? 한 시간가량 업주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유 대표의 배려로 어렵사리 한 성매매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불과 한 시간 뒤 다시 나온 미아리는 화려한 빛을 뿜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돌고 돌아 결국 이곳. 여기서 살고 싶다”

선홍빛으로 물든 유리창 속에 흰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앳된 얼굴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여유로움마저 배어 나왔다. 긴장한 쪽은 기자였다. 마담의 안내에 따라 허름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빨간 조명에 낡은 테이블, 그 위에 놓여 있는 빛바랜 노래방 책과 성냥개비 통. 작은 노래방 기계와 선풍기가 전부였다. 벽에는 한눈에 보이도록 가격표가 붙어 있다. ‘현금 7만 원, 카드 8만 원’ 잠시 후 한 여성이 들어왔다. 올해 37살인 B씨는 양해를 구한 뒤 깊게 한 모금 담배를 빨아 드렸다.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성매매 법 나오면서 안마방이다 뭐다 가봤죠. 똑같이 성매매하는 건데 거기는 안마까지 해요. 다들 힘들어서 다시 돌아와요.”

그는 상고를 졸업하고, 경리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매매 여성들처럼 그도 병든 어머니의 병원비와 생계비를 마련하고자 매춘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저라고 이 일이 좋겠어요. 근데 살려면 돈이 필요한데 이것 외에는 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성매매특별법이 생긴 이후 B씨와 같은 성매매 여성들은 ‘제3의 성매매 업소’로 뛰어든다. 그는 “이곳 업주 분들은 아가씨들한테 함부로 하진 않아요. 가족 같다고 보시면 돼요. 되레 다른 업계에 가보면 더러운 꼴 더 볼 때가 많아요. 돈도 안 주고, 일은 일대로 시키고. 다들 여기로 돌아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이런 B씨에게 1년 뒤 재개발될 텍사스촌은 암담한 현실이다.

“미아리 철거되면 전 갈 곳이 없어요. 모아둔 돈으로 장사하고 싶은데 요즘처럼 장사도 안 되면 그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지난해 ‘미아리 텍사스촌’은 조합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재개발 사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서울시는 이미 구역결정 및 지형도면 고시를 발표해 1년 후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에 유 대표와 업주들은 “답이 안 나온다”고 입을 모은다.

“법이 만들어질 때 우리 같은 사람들 살 길은 마련해주고 만들었어야지. 이렇게 무작정 밀어버린다고 성매매가 사라집니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지금처럼 힘든 상황에서 결국 또 다른 방법으로 이쪽 일을 하게 될 겁니다.”

성매매특별법을 강력히 주장했던 김강자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최근 이 법이 되레 성매매 업종의 ‘풍선 효과’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특히 성매매 여성들의 생계 문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관련 여성 인권마저 하락했다고 말한다.

유 대표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쪽만 누르면 반드시 다른 쪽은 부풀어지다 터져버립니다. 서서히 바람을 빼는 법안이 먼저지 이렇게 터트리면 다 죽죠”라며 씁쓸해했다.

봄을 기다리는 텍사스촌 사람들의 마음은 3월에 내린 눈처럼 시리기만 하다. 그러나 누구도 끝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늘 밤에도 미아리 텍사스촌엔 붉은 등이 켜질 것이다.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pot.co.kr


▲ 텍사스촌의 유래?

텍사스 지방에서는 주로 1층 바(bar)에서 술을 마신 후 술집 여성들과 2층 방으로 올라가 섹스를 즐겼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텍사스촌’이 형성된 것은 6·25전쟁 이후 한국의 방위를 위해 배치된 미군들이 미군부대 주위에서 이런 텍사스식 유흥문화를 퍼트리면서다. 이때부터 ‘술도 마시고 매매춘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지칭해 ‘텍사스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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