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한 습격에 대항하면 ‘폭행죄 + 살인미수?’
러시아에 거주하는 현지 교민과 유학생들의 안전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 7일(현지시간) 러시아에서 유학 중이던 심모(29)씨가 괴한의 습격으로 칼에 목을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괴한은 현지 시간으로 오후 5시경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달 15일에도 알타이주 바르나울시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 중이던 대학생 강모(22)씨가 현지 청년 3명에게 흉기 등으로 집단 폭행을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한인 테러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작년 1월에는 언어연수 중이던 여대생이 스킨헤드족 3명에게 인화성 물질로 테러를 당해 화상을 입었다. 지난 2007년 2월에는 한국인 유학생 1명이 집단 구타로 병원에서 치료받다 한 달 뒤 숨졌고, 2005년 2월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0대 한국인 2명이 흉기에 찔려 부상을 당하는 등 러시아의 치안상태는 심각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현지 한국 유학생과 교민들이 타 인종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일명 ‘스킨헤드’라 불리는 러시아 극우단체는 공공연히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을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스킨헤드는 이방인들이 범죄를 저질러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직업을 빼앗아 생계를 위협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타 인종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다.
러시아는 지금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주변국가에서 몰려든 불법체류자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의 불법 체류와 더불어 외국인 범죄는 러시아 내에서 큰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믿지 못할 경찰
스킨헤드의 외국인 대상 범죄는 경찰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러시아는 강력한 경찰국가 로 유명하다. 동시에 부패한 경찰로 악명이 높다. 러시아에서는 경찰이 행인들을 붙잡고 금품을 갈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경찰이 바로 마피아”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경찰들은 스킨헤드가 외국인들에 테러를 저질러도 개의치 않는다. 스킨헤드의 테러는 대부분 제 3세계에서 온 외국인들을 상대로 발생한다. 길에서 러시아 젊은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을 폭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 한다. 중앙아시아인들을 죽어도 상관없는 불법체류자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20여년간 사업을 해온 박장환(50)씨는 “내가 아는 카자흐스탄인은 테러 위협을 느끼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오히려 검문을 받고 불법체류자로 의심받아 경찰에 연행돼 300달러를 빼앗겼다”며 “한국인들 중에서도 러시아에 와서 경찰에 금품을 빼앗긴 경험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스킨헤드는 중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하다. 중국인을 러시아어로 ‘키타이스키’라고 부르는데, 스킨헤드는 길에서 동양인을 보면 “키타이!”라고 외치며 달려든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중인 이요셉(38)씨는 “러시아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인지 중국에 대한 위기의식이 크다”며 “동양인은 모두 중국인으로 보고 일단 무시하는 눈치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인이라고 밝히면 적개심과 혐오의 눈빛을 한풀 꺾는다”고 전했다.
스킨헤드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도 증오하기는 마찬가지다. 안전하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자국민 보호노력은 기대이하다. 경찰에 부당하게 끌려가 유치장에 감금당해도 대사관은 본인의 부주의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다.
러시아에서 유학한 적 있다는 김정국(28)씨는 2006년 러시아에서 기막힌 일을 겪었다.
김씨는 “여권을 분실해 대사관을 통해 임시여권을 발급받았는데, 경찰이 위조가능성을 들어 나를 무조건 연행하고 폭행까지 했다”며 “미화 500달러를 주면 풀어주겠다는 경찰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유치장에서 이틀간 갇혀있었다. 갇혀 있으면서 대사관에 연락했는데 풀려나는 그 순간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국민에 무관심한 대사관
외국인에 대한 경찰의 이중 잣대도 문제다. 러시아에서는 외국인의 폭력사용을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다.
스킨헤드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습격해도 이에 대항해 같이 싸우면 외국인에게 폭행 및 살인미수 등 무거운 혐의가 적용된다. 자국민 보호를 내세운 차별인 것이다. 이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청년들의 시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교민들과 유학생들은 대사관의 방관적인 태도도 문제라고 한 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를 오가며 무역업을 하고 있는 이승규(35)씨는 “우리나라의 위상과 국력은 다른 나라가 무시하지 못할 수준에 올랐지만 자국민보호는 아직도 후진국과 다를 바 없다”며 “대사관에 가면 직원들의 무사안일하고 방만한 태도에 마치 외국에 버려진 느낌을 받는다. 세계화를 위해선 외교라인의 개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편 심씨는 전날 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으며,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러시아 네티즌들도 “韓유학생 피습범 잡아라!”
외교통상부는 최근 러시아에서 우리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사건이 속출함에 따라 10일 러시아에 체류 중이거나 여행 중인 우리 국민들에게 신변안전 주의사항을 공지했다.
외교부는 이날 홈페이지(www.0404.go.kr)를 통해 게시한 공지문에서 “스킨헤드나 극우단체에 의한 공격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다”며 단독 외출이나 심야 이동을 가급적 피할 것을 당부했다.
외교부는 “일몰 이후 지하철역 인근이나 축구 경기장, 한적한 거리 등은 외국인 대상 폭력행위가 빈발하는 지역이므로 피해 주시기 바란다”며 “가급적 단정한 복장으로 여행한 것도 외국인 혐오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밝혔다.
또 군중이 모이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무리지어 있는 러시아 청년들을 발견할 경우 신속히 대피하고 만약 공격을 당했을 경우 최대한 현장에서 이탈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부는 특히 “4월20일 히틀러 생일과 11월4일 국민통합의 날 등에 외국인 혐오범죄가 집중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각별한 주의를 요망했다.
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지난 7일 발생한 한국 유학생 흉기 피습 사건에 러시아 네티즌과 언론들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러시아 언론매체와 주요 포털 사이트에는 사건이 터진 이후부터 현지 경찰에 대한 비난과 조속한 사건 해결을 바라는 글들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러시아의 한 네티즌은 “도대체 경찰들은 왜 그런 나쁜 놈들을 빨리 잡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연방보안국(FSB)이 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네티즌은 “경찰은 사건 해결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이런 사건이 계속 생긴다면 러시아로 유학 오는 학생 수가 줄 것이다.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 러시아 관영 통신 리아 노보스티, 시사 라디오 방송 `에호모스크바, 일간지 콤소몰스카야 프브다 등 20여 개 러시아 언론매체들도 사건 발생 당시 상황과 부상당한 심모(29)씨의 상태를 보도했다.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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