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키우고 ‘딸’ 죽이고

가상의 캐릭터에 빠져 진짜 딸을 굶겨 죽인 비정한 부부가 5개월간 도피 끝에 붙잡혀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4일 수원 서부경찰서는 생후 3개월 된 딸을 혼자 둔 채 집 근처 PC방에서 매일 12시간 이상 게임을 즐겨 아이를 방치, 살해한 부부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미숙아로 태어난 딸 양육에 스트레스를 받아 현실 도피 수단으로 인터넷 게임에 매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부부가 즐긴 게임은 다름 아닌 ‘프리우스 온라인’란 롤플레잉(역할극)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가상 속 ‘아니마’란 소녀 캐릭터를 키우는 일종의 아기 돌보기 게임이다. 이에 해당 게임업체와 누리꾼들은 일제히 경악하고 있다. “대단히 유감이다”라는 CJ인터넷 측 성명에도, 누리꾼들은 각각 “해당 사 책임이다” “개인의 잘못”이라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요서울]은 A게임업체 프로그래머B씨(25)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터넷 중독의 심각성과 대책 마련에 대해 알아봤다.
공교롭게도 부부의 만남 역시 인터넷 때문이었다.
2008년 부부는 온라인 상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경찰에 따르면 남편 김모(41)씨와 부인 김모(25)씨는 그해 결혼해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부인 김 씨의 친정집에서 지내왔다.
특별한 수입이 없던 그들은 지난해 6월 아이를 낳고, 그해 9월 초 속초로 분가했다.
‘육아 스트레스 때문에’ 현실 도피
이들의 딸은 태어날 때부터 불행한 미숙아였다. 2.25kg의 딸은 태어나자마자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에 부부는 한 달간은 병원 치료를 해줬지만, 아이가 낫지 않자 방치하기 시작했다. 비극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딸 문제 외에 경제적인 문제도 심각했던 부부는 현실의 스트레스를 풀고자 PC방 문을 두드렸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PC방에서 게임을 즐긴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이 3개월간 신생아 딸은 집에서 혼자 방치됐다.
결국 지난해 9월 24일 PC방에 갔다 온 부인 김 씨가 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이때만 해도 감히 부부가 아이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가 너무 말라있는 것을 의심한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돌연 의뢰하자 김 씨 부부는 5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이다 지난 1일 검거됐다.
이에 누리꾼들은 일제히 “사람도 아니다” “남의 자식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며 부부를 맹비난했다. 게임 업계 측 역시 “황당하고, 당혹스럽다”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아”
김 씨 부부의 사건이 더 충격을 준 데에는 이들이 즐긴 게임이 일종의 ‘아이 돌보기’게임인 ‘프리우스 온라인’이었기 때문이다.
프리우스 온라인은 CJ인터넷에서 만든 온라인 롤플레잉(역할극)게임이다. 이 게임은 가상의 소녀 ‘아니마’를 키워 전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용자로 하여금 아니마에 대한 모성을 자극해 게임에 몰두하게 한다.
자신의 딸 양육에는 등을 돌렸던 부부가 되레 가상의 캐릭터에는 공을 들인 셈이다.
누리꾼들은 부부의 만행이 알려지자 “부모도 아니다. 처벌해라” “게임 시간을 제한해라” 등 다양한 의견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프리우스 온라인’을 폐지하라는 일부 과격한 누리꾼들의 주장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게임을 즐기는 누리꾼 대다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누리꾼은 “언론이 마치 ‘프리우스 온라인’이 부부를 게임 중독에 빠지게 한 양 호도하고 있다”며 “되레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고 말했다.
해당 업체인 CJ인터넷 담당자 역시 “이번 사건에 매우 유감스럽다”면서도 “솔직히 2008년 건전한 게임 부분에서 공로상도 받은 게임인데, 이런 일이 터져 놀랐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A 게임업체 B씨도 “프리우스 온라인은 게임 업계에서 주류는 아니다”며 “진짜 게임 중독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B씨의 말에 따르면 현재 온라인상에서 아이템 하나에 수천만 원이 오가는 것은 물론이며, 현실에서보다 더 친밀한 가족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B씨는 “김 씨 부부처럼 친딸 대신 캐릭터를 키우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대부분 게임 이용자들이 가상 속 지인들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B씨가 알려준 C 게임은 리듬게임으로 10대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누리꾼들은 각자 자신을 ‘엄마’ ‘아빠’ ‘딸’ 등 가족을 구성하여 역할놀이를 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의 접속 시간이 주기적일 뿐 아니라, 상당히 장시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용자들은 마치 현실 속의 친구, 가족처럼 대화를 이어가며 친밀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B씨는 “문제는 이들이 10대라는 점이다”라며 “장시간 게임에 접속해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들 대부분이 서로 만나서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게임 제한 제도 마련돼야”
이번 사건으로 여론은 “게임 업체의 책임”이라는 입장과 “개인의 책임”으로 대립하고 있다. 이에 CJ인터넷은 “인터넷 게임 중독 문제는 우리도 공감한다”며 “그동안 정부, 업계 및 회사 내에서 사용 제한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는 중에 이번 일이 터졌다”고 말했다.
또한, CJ인터넷 측은 “자식을 키우는 처지에서 현재 놀이문화가 인터넷 게임에 쏠린 것은 문제”라며 “조만간 확실한 게임 제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A 게임 업체 B씨도 “00이란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하루에 딱 사용할 수 있는 00이 50개여서, 그 이상 사용하면 게임 자체를 할 수 없다”며 “게임 업체가 자구적으로 제한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음에도 불구 관련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한 누리꾼은 자신의 블로그에 그간 게임 아이템 사용료를 올려놨다. 1년간 1800만 원을 탕진한 그는 “결국 남은 것은 빚”뿐이라며 후회했다.
게임은 일종의 유희다. 누구나 즐길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실도피성의 인터넷 중독은 이번 사건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양산한다. 이에 정부와 게임 업계, 이용자들의 자정 노력이 시급하다.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pot.co.kr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