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대한민국 수사반장 31탄 한필수 경위
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대한민국 수사반장 31탄 한필수 경위
  • 이수영 기자
  • 입력 2010-03-02 13:59
  • 승인 2010.03.02 13:59
  • 호수 827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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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 출신 떼강도 상대, 목숨 건 검거작전”
실제 켈로부대원을 담은 사진.(위) - 실제 북파 공직원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군도, 미군도, 유엔군도 아니다. 군적과 군번조차 없어 적진에서 무참히 죽음을 맞아도, 부상을 입어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반도 평화 통일과 민족 번영을 추구한 비밀 첩보부대. 우리는 ‘켈로(KLO·Korean Liaison Office·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부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1등 공신이자 북파공작 전문 특수부대. 정식명칭 대신 일명 ‘켈로부대’로 불리던 비밀용사들이 불과 십수년 만에 남루한 범죄자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0년대 초 살인과 약탈, 강간을 일삼던 떼강도 일당 10여명을 추적하던 형사들은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짧은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같은 이유로 용도 폐기 당한 비운의 영웅들은 그 분노를 사회와 민간인을 향해 폭발시켰다. 철저히 파괴본능만 남은 ‘첩보기계’들을 상대로 경찰은 목숨을 건 검거작전을 폈다. 당시 서울 서부경찰서 소속 강력계 형사였던 한필수(69)경위 역시 이 작전에 투입됐다.

갓 군을 제대한 1963년 22세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한 경위는 충청도경, 경기 고양경찰서를 거쳐 1969년 2월 서울 서부경찰서 창설 멤버로 수도입성에 성공했다. 그가 ‘서울 형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 채 되지 않은 1970년대 초 서울은 물론 인천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떼강도단의 출몰이 잇달았다.

“서울 전 지역과 인천 부평 일대까지 놈들의 활동 무대는 엄청나게 넓었습니다. 수사팀에 접수된 피해상황을 종합했을 때 일당이 적어도 5~10명은 될 거란 결론이 나왔지요. 범행수법도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약탈은 물론 폭행, 부녀자 강간까지 닥치는 대로 범죄행각을 이어간 겁니다.”


‘용도폐기’ 당한 비밀부대

용의자를 특정 하는 과정에서 수사팀은 믿기 어려운 첩보를 입수하게 됐다. 바로 떼강도단의 특별한 ‘출신성분’에 대한 것이었다. 한 경위의 말을 들어보자.

“켈로부대라고 혹시 들어봤습니까? 쉽게 말해 ‘실미도 부대’와 비슷한 북파공작원 특수부대라고 할 수 있지요. 놈들은 바로 이 켈로부대 출신의 전직 북파공작원들이었습니다. 켈로부대는 군 당국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유령부대’였지요. 더 잔인한 것은 당시 부대가 이미 용도 폐기된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쓸모없는 소모품으로 전락한 북파공작원들이 수도권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떼강도단의 정체였다는 얘기다. 존재도, 업적도 없는 켈로부대. 그들은 과연 누굴까.

한국전쟁 무렵 정보수집과 북파공작 전문 첩보부대로 정식 명칭은 ‘KLO’ 일명 ‘켈로’라 불렸다. 지난 2006년 켈로 대원 출신 이창건(당시 77세)씨가 쓴 증언집(KLO의 한국전 비사·지성사)을 통해 당시 활약상과 규모가 일부 드러났지만 여전히 조직과 관련된 세부적 사항은 베일에 싸여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창설된 켈로부대는 대북 첩보 활동을 위해 미군이 설립한 비밀 정보기관이었다. 이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을 계기로 켈로부대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게 된다.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서해만에 상륙 시기를 결정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나서는가하면 한밤중 연합군을 인천으로 인도하기 위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등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것. 맥아더 장군의 뛰어난 역량 덕분으로 여겨졌던 인천상륙작전은 사실 켈로부대의 노력과 희생이 만든 ‘걸작’이었던 셈이다. 한 경위는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들의 사연을 간략하게 전했다.

“수사팀이 확인한 바로는 문제의 켈로부대원 상당수는 가족 등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 혹은 전과자였습니다. 대북 첩보활동이라는 임무 자체가 위험천만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군 당국은 켈로부대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지요. 이런 이유로 외톨이나 전과자들을 물색해 부대원으로 선발한 겁니다. 물론 임무를 수행하면 엄청난 보상을 해주겠다는 사탕발림도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당국이 약속했던 ‘엄청난 보상’이 그저 공수표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켈로부대는 용도 폐기됐다. 시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버려졌다는 얘기다.


‘전설의 수사관’ 최율식 반장

“부대가 해체되고 이들은 민간인이 됐지만 군적도 없고 복무경력도 인정되지 않아 연금 같은 건 꿈도 못 꿨지요. 부대원 개인이 하나의 살인 무기이자 정보요원이기 때문에 쉽사리 일자리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더군요. 궁핍한 생활 탓에 부대원 상당수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답니다. 결국 그 한이 쌓이고 쌓여 무서운 범죄조직으로 전락한 셈이지요.”

특수전사령부(특전사)나 해군특수부대 U.D.T 등은 하나의 부대가 특정 임무를 수행하지만 북파공작원은 개개인이 살생무기이자 정보기관이다. 처음부터 살인과 죽음을 훈련 과목으로 익힌 이들은 첩보부대 출신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놈들을 잡는데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당시 최율식 반장을 필두로 서부서 강력계 형사들이 몽땅 검거작전에 투입됐습니다.”

한 경위는 상세한 검거 경위나 수사 과정은 밝힐 수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한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을 불사했던 비밀부대원이 강도단으로 전락해 경찰에 일망타진 됐다는 건 비극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한 경위는 인터뷰 중 10년 넘게 강력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선배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전·현직 강력계 형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수사관으로 꼽히는 인물, 바로 최율식 반장이다.

1990년대 까지 서울시내에서 벌어진 굵직한 강력 사건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최고의 형사였던 최 반장은 최근 위암 수술을 받은 뒤 투병 중이다. 경찰 경력은 한 경위가 선배지만 나이와 직급은 최 반장이 위다. 한 경위는 최율식 반장과 말단 순경 선후배로 만나 10년 넘게 혈육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한 경위에 따르면 최 반장을 필두로 한 서부경찰서 강력반의 활약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그들이 해결한 수천 건의 사건 가운데는 인두겁을 쓰고 벌였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엽기적인 살인사건도 있었고 정부 고위층이 연루된 민감한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투병 중인 최 반장은 과거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절한 바 있다.

그는 “내가 담당한 사건들은 대부분 최율식 반장과 함께 해결한 것들”이라며 “그분 앞에서 사건 해결의 주역이 나라고 자랑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한 경위는 아예 “나를 인터뷰하지 말고 최율식 반장을 먼저 찾아가는 게 순서였다”며 기자를 탓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이유로 “인터뷰 사진 촬영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요즘도 최 반장님과는 일주일마다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이젠 반장이란 호칭대신 ‘최 형’이라고 편하게 부르지요. 개인적으로 큰 일(암 투병)을 치른 뒤 부쩍 바깥출입이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까운 맘이 큽니다. 한때 서울 일대 범죄꾼들 사이에서 ‘저승사자’로 통했던 명수사관이 세월과 병마 앞에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저 역시 서글퍼지더군요.”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리얼스토리 talk box
한필수 경위

지난 1999년 36년 경력을 끝으로 은퇴한 한필수 경위는 한 평생 민완형사의 길을 고집한 베테랑이다. 충청도경과 경기 고양경찰서, 서울 마포, 서부경찰서를 거쳐 마지막 해 은평경찰서 강력4반장, 감식계장으로 재직한 그는 은퇴 직전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 경찰 입문 시기가 굉장히 빠르다.
▶ 카투사 복무를 마치자마자 22살에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동기들에 비해 굉장히 빠른 셈이다. 맨 처음 부임한 곳이 충청도 외곽의 파출소였는데 입사 7개월 만에 상관 눈에 띄어 충청도경 형사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36년 동안 강력·폭력반 등 민완형사 생활을 고집했다.

- 어린 나이에 형사가 됐다. 가장 처음 담당한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지.
▶ 사실 처음 몇 년 동안은 사건다운 사건을 처리하지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기’한테 선배들이 일을 주겠는가. 속칭 ‘가방모찌’로 선배들 뒤를 쫓아다니며 어깨너머로 수사를 배웠다. 근 10년 동안은 형사계 사무실 안에서 ‘식모’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현장에서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먼저 뛰어나가 해치웠다. 시골형사부터 시작해 서울에서 제대로 된 강력계 생활을 하기까지 밑바닥부터 시작한 보람이 있었다.
10년 쯤 지나니 수사의 맛을 알게 됐고, 경력 20년차가 된 뒤에는 수사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런데 30년째가 되니 오히려 가장 어려운 게 수사였다.
내가 한 사건들은 아까 말했듯 대부분 최율식 반장과 함께 했던 것이다. 사건과 관련된 사항은 그 분이 더 자세히 알고 있고 그분을 통해 듣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 현직 시절과 은퇴 이후 생활에 변한 게 있다면.
▶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 1~2년은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에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런데 3년 쯤 지나니 가슴 한쪽이 허전해졌다. 과거에 ‘날아다니던’ 형사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됐으니 오죽하겠는가.
개인적으로 경찰 조직에 대한 원망도 약간 느낀다. 퇴직 경찰들은 정말 외롭다. 현직 시절 관리했던 정보원들도 처음 1~2년은 ‘전관예우’를 해주지만 이내 연락을 끊기 일쑤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퇴직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도와줬다 빈털터리가 돼 고생하는 동료들도 부지기수다. 정말 열심히 일한 수사관들을 ‘퇴물’취급하는 경찰 조직에 배신감을 느낀 적도 있다.

- 요즘 후배들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 정말 편하게 일한다. 그만큼 긍지도 없다. 현직시절 까마득한 후배들이 지금 일선 팀장급으로 일하고 있는데 가끔 내게 하소연을 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 다루기 어렵다고. 사건이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가족 핑계를 대며 칼 퇴근을 하거나 정보원과 어울려 다니다 부정에 연루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환멸감이 들 정도다.
경찰, 특히 민완형사는 조직 차원에서 자격 요건을 엄격히 세우고 기초훈련부터 제대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본다. 형사가 사건을 두고 집에서 편히 발 뻗고 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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