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공공기관들이 지방으로 속속 내려가면서 ‘혁신기러기’들이 늘고 있다. 혁신기러기란 가족을 떠나 나 홀로 지방생활을 하는 가장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해외에 자식과 부인을 떠나보낸 ‘기러기아빠’의 국내 판이다. 그런데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인데 이 틈을 이용한 불미스러운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어 해당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사내불륜과 꽃뱀 피해 사건이 논란이 돼 퇴사하는 직원도 점차적으로 늘고 있어 일부 기업에선 ‘00주의보’까지 발령된 상태다.
나홀로족 남녀 ‘외로워서’ ‘일이 힘들어서’…사내연애 극성
서울에 있는 부인들끼리 주중에 몰래 회사 찾아…남편 단속?
주말은 서울에서, 주중에는 지방에서 지내는 공기업 과장 A씨.
업무 시간 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매일같이 어울리는 동료들과의 시간도 이제는 따분하다. 왠지 모를 외로움에 술을 찾는 횟수가 늘었고, 몽롱해질 무렵엔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본 중년 남성의 불륜 스토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헬스클럽 내 소모임에 자주 나가 이 멤버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다. 문제는 이 멤버 중 눈에 쏙 드는 여성멤버가 있다는 것. 이 여성과의 므훗한 생각(?)에 더 자주 찾게 된다. 그런데 그는 아내의 전화에 왠지 죄짓는 기분이다.
신의 직장으로 부러움을 사는 고액 연봉의 공기업 직원들이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이들에 대한 처우(?)와 관련해 해당 기업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나홀로 타지생활이 지속되면서 불륜에 대한 각별한 주의도 요구되지만 미리 방지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혼인 외 남녀가 눈이 맞아 가정이 풍비박산난 이야기는 혁신기러기들 사이에선 더 이상 새삼스러운 소재가 아니다.
외로움에 그만
지난달 중순께 지방 이전 공기업 직원 간 사내불륜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C공기업 사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방 모 도시로 이전한 C공사는 직원 중 서울 본사에 있을 때에도 사내불륜이 심심치 않게 터져 감사실이 바빴는데 지방으로 모두 옮긴 후엔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가능성이 적어 직원 단속에 더 많은 인력이 충원되고 있다는 후문이 다.
이는 지난달 본사 이전 후 처음으로 인사위원회가 열렸는데 본사에서 근무하던 유부녀 D계장과 유부남 E차장의 불륜행위가 적발된 것. 두 사람은 현재 퇴직했다. D계장은 평소 남편이 바빠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는다는 투정을 부리자 유부남 E차장이 위로하며 연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D계장이 E차장과의 미팅을 메모한 수첩과 둘만의 대화를 나눈 메신저 내용을 남편에게 들키면서 두 사람의 잘못된 사랑(?)이 마침표를 찍게 됐다. D계장의 남편이 본사 감사실에 ‘가정을 파탄 냈다’, ‘E차장을 해고하지 않으면 폭로하겠다’고 압박해 최근 인사위원회에서 퇴직시켰다. D계장은 자진사퇴했다.
앞서 지난 2월 울산지법은 사내 불륜을 폭로하겠다는 협박녀를 살해 암매장한 혐의로 G공기업 직원에 대해 ‘징역 30년’을 선고한 일도 있었다.
공기업 직원 G씨는 지난해 6월 울산의 한 도로변에서 알고 지내던 여성을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암매장한 혐의로 기소됐다.
G씨는 2년 전 내연녀와 내연녀 소개로 만난 여성이 “5억 원을 투자하지 않으면 불륜 사실을 회사와 집에 알리겠다”고 협박하자 살해를 결심한 것으로 경찰조사에서 드러났다.
직원 교육 나서기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노리는 꽃뱀 일당의 한탕치기 위협도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혁신기러기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한탕을 노린 꽃뱀들이 공기업이 소재한 지방으로 모이고 있다’는 말도 회자된다.
설마 하는 이야기로 들릴 법하지만 실제 꽃뱀 피해가 발생하고 있어 일부 공기업들은 강사를 초청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기 바쁘다.
공기업 강의를 자주한다는 한 강사는 “(최근 모 공기업 직원을 상대로) ‘성희롱 예방 교육’ 명목으로 ‘꽃뱀 주의 교육’을 실시, ‘누군가 이유 없이 접근해 오면 조심해라’ 자칫 패가망신하고 회사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 등의 교육을 했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공사 관계자는 “불미스러운 일이 종종 발생하다 보니 서울에 있는 부인들이 모임을 결성해 주중에 남편 몰래 회사로 찾아와 미행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부부간 신뢰가 무너지면서 회사 일에도 지장을 받는 직원들이 일부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내에서 불륜을 강도 높게 제재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 했다.
한 혁신기러기는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며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걸리지 않는 선에서 아찔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