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한류 원류인 우리 차와 찻잔
1994년 7월 27일 경복궁내 조선왕궁박물관 기공식이 있었다. 1996년 12월 12일 새 박물관 개관을 위해 모든 전시유물과 사무실 이전이 완료됐다. 개관하기 전 개관준비를 하면서 총독부건물 철거준비 작업을 면밀하게 진행했다.
철거업자를 선정하고 해방 50주년 행사에 맞춰 1995년 8월 15일 경복궁내 남쪽 광장에서 총독부 철거 축하 행사를 하면서 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작업이 진행됐다. 드디어 그날부터 철거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철거 즈음에서 뉴욕타임스의 여기자가 인터뷰를 하러왔다. 여러 가지 경우를 들으면서 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본인은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리와 일본의 경우를 반대 입장에서 얘기해봅시다”라고 했다. 나는 여기자에게 “우리가 일본을 강제점령하고 악질적 탄압을 하고 일본 황궁을 헐어버리고 일본 총독부를 세웠다고 가정합시다. 일본 황궁은 누구도 터럭하나도 건드릴 수 없게 신성불가침으로 지극정성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기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것도 없이 철거이유를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침략자가 훌륭한 문화유산이요 왕궁을 헐고 총독부를 세운 예가 또 있겠느냐”고 했더니 철거이유를 분명히 알겠다고 했다.
총독부 건물 철거는 불과 2~3개월 만에 끝났다. 철거하면서도 일부 여론이 그래도 어디 옮겨놓으면 어떠냐는 의견이 끈질기게 거론됐다. 철거를 하면서 보니까 이 건물은 석조건물이 아니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 겉에 화강암 판석을 붙인 건물이었다. 그것도 정면만 화강암이고 측면과 후면은 인조석이었다. 화강암 판석을 건식으로 붙이지 않고 습식으로 붙였기 때문에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업자와 감독관에게 엄명해 돌기둥, 중앙정면의 장식물 등 뗄 수 있는 것은 가능한 떼어내어 역사의 증거물로 보존토록 했다. 그때 첨탑과 상당한 양의 석재를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지금도 그 일각에 전시되고 있다. 총독부 건물이 위대하고 석조건물이고 매우 견고하게 지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한 이야기였다. 총독부 건물을 삥 둘러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은 물론 철근 콘크리트로 돼 있었다. 그런데 이 기둥과 각 층의 보와 슬라브 연결이 허술하게 돼있어 보와 슬라브에 무거운 하중이 실렸다. 더 오래 박물관으로 사용했다가는 보와 슬라브가 내려앉을 위험이 있었다.
또 슬라브 바닥에 철근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린 아주 얇은 철판으로 돼있었다. 와이어 매쉬와 같아 슬라브 자체도 아주 약하고 허술하게 시공됐다. 우리 속에 허울 좋은 도깨비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엄청난 석조건물이지만 정면만 돌을 붙인 것이고 좌우와 후면은 인조석이었다. 기둥과 보와 슬라브의 연결도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3000억 원이 아닌 30억 원으로 단시일 내에 철거할 수 있었다. 중앙 홀 돔 천장은 유리로 돼있는데 이를 지탱하기 위해 철근을 쓰지 않았다. 대신 2m넘는 철골 콘크리트로 골조를 만들어 그 하중이 엄청났다. 그 위에 올라가 보고 크게 놀랐다. 철거 때 보니까 그 구조와 시공도 매우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서울시청에서 광화문네거리를 지나면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멀리 수려한 북한산과 북악산이 너무 아름답고 반갑게 눈에 들어왔다. 경복궁의 전각들도 보는 이를 반겨 맞이한다. 철거를 반대하던 몇몇 사람이 일부러 찾아와서 또는 어느 장소에서 만나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나니까 서울이 아름다워졌습니다”며 “지금 생각하니까 철거를 아주 잘 했습니다”라는 말도 들었다.
전통문화 500년 한류의 원류
일본인이 수백 년 애용한 조선 찻잔에 대한 역사적 고찰-소위 고라이다완(高麗茶碗)이란 무엇인가
찻잔은 차를 마시기 위한 그릇이다. 그러니 차와 찻잔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찻잔을 얘기하려면 차를 조금은 알아야 하나 필자는 차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차에 대한 상식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려한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말기인 선덕여왕 때부터였다고 한다. 차가 널리 퍼진 것은 9세기 초경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구해다가 지리산에 심은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기후와 입지조건이 알맞은 영남과 호남지방이 우리나라 차의 본 고장이 됐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승려사회에서 차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사찰은 물론이고 귀족문인 사회에서도 음다 풍류가 널리 퍼져있었다.
이에 따라 차와 약 등을 관리하는 차방(茶房)이라는 관청도 있었다. 팔관 연등회와 수륙제 등 국가적인 큰 제전이나 왕세자 왕비의 책봉의식에 진다의식이 행해졌다. 따라서 차를 만들고 마시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와 다구(茶具)가 크게 발전했다. 큰집에서는 다정(茶亭)을 꾸미기도 했고 개경에는 차를 마시고 쉴 수 있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청화백자 괴석 파초문 묵상
호암미술관 19세기 높이2.7cm 폭(상면)7.6*4.4
우리나라 도자문방구는 17세기 말 18세기 초경에 연적·필통 등이 다양해졌다. 준수한 기형으로 세련되기 시작했고 18세기후반 19세기에 다종다양한 백자 문방구가 많이 제작돼 큰 성황을 이뤘다.
원래 조선은 국초부터 장식이 있고 기교를 부린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단순 간결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점차 장식이 있고 그림이 있는 백자를 선호하게 됐다. 값싼 코발트의 푸른색 안료가 많이 수입돼 백자에 그림도 많아지고 기형도 어느 정도 장식이 붙은 기물을 만들기에 이른다.
묵상의 재질은 백자와 단목·화류 등 아주 단단한 나무다. 돌로 만드는데 백자 묵상에는 순백자도 있다. 이와 같이 그림과 장식성이 있는 등 다양하게 발전됐다.
이 묵상은 두루마지 탁자나 문갑의 모양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다. 두루마지 두 발사이의 천판아래 안상도 붙이고 위에 괴석 파초문을 그렸다. 양 측면에 쌍화자를 썼지만 분원 청화백자 묵상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인 아주 귀한 작품이다.
천판 중심부위가 약간 주저앉고 양쪽에 면으로 이뤄졌다. 다리가 벌어졌지만 재미도 있고 귀엽기도한 명품이 아닐 수 없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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