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완종 리스트’에 당정청협의회 당분간 중단
수사결과 따라 여권 동반 침몰 가능성도
[일요서울 | 김재현 프리랜서] ‘성완종 리스트’가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향후 검찰의 행보에 정치권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함께 로비 장부 실체가 드러나자 청와대와 친박계가 역풍을 맞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40분간 긴급 독대했다. 정치권에서는 향후 검찰 수사의 방향을 놓고 여러 분석과 관측이 쏟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역풍 아닌 역풍을 맞게 된 만큼 자원외교와 전 정권 유착 의혹과 관련된 검찰 수사는 속전속결 형태로 마무리 수순을 밟은 것이라는 말이 무성하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친박계와 친이계를 중심으로 한 비박계 간의 타협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를 통해 친박계 핵심이 줄줄이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 박 대통령이 여당 대표와 심층 논의를 한 것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날 단독회동은 박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을 앞두고 이뤄진 것으로 박 대통령이 나라를 비운 사이 여러가지 당 차원에서 대응을 주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는 통상적으로 대통령이 외국 순방에 나갈 때면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를 불러서 여러 국정운영에 대해 당부해왔기 때문이다.
또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여당 핵심 관계자와 독대를 한 것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지난 2년 2개월간 새누리당 또는 여야 지도부와 총 9차례 회동했지만 사전에 실무조율을 거쳤고, 회동 모습을 언론에 일부 공개할 정도로 비공개 형식의 독대는 배제해 왔다.
또 박 대통령은 김 대표가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된 뒤인 작년 7월 15일 새누리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김 대표와 별도로 만나긴 했지만 5분 남짓 만남을 가진 것에 불과했다. 대통령이 당 대표와 깊은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이번 ‘독대’를 놓고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역풍 맞은 청와대 해법은?
박 대통령은 당초 이날 낮 진도 팽목항을 방문한 뒤 광주공항을 통해 중남미 4개국 방문을 위해 곧바로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급히 수정, 김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이 때문에 출국 시간도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췄다.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의 파장이 청와대와 여권을 압박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박 대통령이 황급히 집권여당 대표인 김 대표에게 손을 내민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성완종 리스트’에 국정 2인자인 이완구 총리와 전현직 청와대 비서실장 3명이 언급되는 등 정권 핵심실세들이 줄줄이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박 대통령이 다급해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에 비박계마저 등을 돌릴 경우 향후 국정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자원외교 수사에 대한 입장표명과 비박계와의 관계개선 등을 논의한 것 아니냐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무엇보다 자원외교에 대한 검찰 수사를 놓고 김 대표와 조율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적지 않다.
김 대표는 최근 현직 총리와 현직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이 거론된 ‘성완종 리스트’가 터져 나오자 그동안 당정청간 소통의 채널로 활용했던 고위당정청협의회도 당분간 중단할 것임을 시사했다.
김 대표와 의혹의 한 복판에 있는 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나면 ‘성완종 파문’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만난 것이라는 오해를 살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성완종 리스트’라는 핵폭탄이 터지자 김 대표가 현정부와 선긋기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단독회동을 계기로 박 대통령은 ‘성완종 파문’의 해결사로 김 대표를 선택하고 대신 자원외교 수사에 대한 모종의 합의안을 내놨을 것이라는 말이 청와대 주변에 무성하다. 즉, 일종의 ‘빅딜’을 제안했을 것이라는 소리다.
이 같은 추측은 박 대통령과 단독 회동을 마친 김 대표의 언행에서도 비친다.
김 대표는 이날 회동을 마친 뒤 브리핑에서 “저는 당내외에서 분출되는 여러 의견들을 가감없이 대통령께 말씀드렸다”며 진솔한 대화가 오갔음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 외 박 대통령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등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밝힐 수 없는 둘 만의 대화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양날의 칼 쥔 청와대·검찰
청와대와 검찰 주변에서는 “청와대가 김 대표와 긴급조율을 한 것으로 미뤄 향후 검찰이 기업수사와 관련해 수사를 전방위로 확대하지 않고 기업 실무 관계자들만 처벌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국민적 공분과 관심을 한꺼번에 사고 있는 초유의 사건이어서 검찰 입장에서는 부담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일단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성 전 회장의 정치권 금품 제공 의혹을 사실상 수사하기로 한 상황이다. 검찰 안팎에서 “성완종 리스트와 기업수사가 국민적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여론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어 향후 검찰이 어떻게 수사를 전개할지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자원외교 비리 의혹의 ‘별건수사’ 논란 등으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던 검찰은 성 전 회장의 금품 제공 의혹을 두고 신중한 입장이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이 여야 핵심인사들과 두루 알고 지내왔다는 점에서 수사가 특검으로 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특검을 통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될 경우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 드러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정치검찰 비난이 들끓게 될 가능성도 있어 검찰은 여권 핵심부에 대한 수사를 피하기도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특검 가능성도 점쳐지면서 정치권에서는 이례적인 신속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는 검찰 수사가 ‘메모 작성경위 확인’ 수준에 머물 수가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은 특검에서 추가로 드러날 부분들에 대비해 향후 정국을 뒤흔들 초대형 의혹 사건을 먼저 수사해야 형편이 됐다.
논란의 출발점이 된 자원외교 비리 의혹 수사를 두고 여러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자원외교 수사는 경남기업 수사가 중심을 잃으면서 덩달아 이미 수렁에 빠진 상태다.
지난달 경남기업을 첫 타깃으로 잡아 자원개발 지원금인 성공불융자금을 빼돌린 혐의를 파헤칠 때만 해도 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단단히 쥐고 있었다. 경남기업의 해외 자원개발 비리에 연루된 광물자원공사와 석유공사 등 자원공기업 등으로 조준선을 옮기면서 나랏돈을 함부로 쓴 비리 대상자들을 차례로 처벌하겠다는 게 검찰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이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검찰은 중대 고비와 맞닥뜨렸다. 성 전 회장은 지난 8일 자청한 기자회견과 자살 직전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문제삼았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회동을 한 이후에도 검찰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성 전 회장 메모의 증거능력 등 여러 사정을 면밀히 검토해 수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성역없는 수사’ 촉구 주문
일단 검찰은 경남기업과 무관한 자원외교 의혹과 기업비리 의혹은 흔들림 없이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1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연 김 대표를 필두로 여권에서부터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했다. 성완종 리스트가 여권 실세들을 겨누는 내용이지만 ‘선제적 수사 촉구’로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여권의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검찰은 정치권의 ‘주문 수사’를 당장 소화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정치권이 향후 특검 등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검찰 역시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은 ‘별건 수사’가 아니라고 부인했던 경남기업 수사와 관련해 정치권의 주문으로 막대한 파급력을 지닌 성완종 리스트를 시작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업수사에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현 정권 실세들이 등장하는 사건이어서 수사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야권에서부터 ‘특검론'이 제기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야권이 특검 주문을 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여권 일각에서 특검론이 입에 오르기 시작한 이상 야권에서도 특검주문에 불을 지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 전 회장의 자원외교 비리를 수사해온 검찰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수사가 아니었다”며 표적수사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는 최근 “지난해부터 국회와 언론 등에서 해외 자원개발과 관련해 여러 구조적 문제점과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수사에 착수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아울러 “경남기업을 수사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성공불융자금을 대출한) 경남기업이 2009년 이후 2차례 워크아웃을 시행할 정도로 재무상황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상환 능력이 의문시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검찰은 자원외교 수사 다음 표적으로 SK이노베이션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검찰은 자원외교 비리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포스코, 경남기업에 이어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 하고 있다.
검찰은 최근 지식경제부 등이 SK이노베이션의 로비로 브라질 유전 사업 성공불융자 상환금 1340억원을 감면해줬다는 의혹에 대해 감사원이 지식경제부 전 고위 공무원 등을 수사의뢰한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임관혁)에 배당, 관련자 소환 등 본격적인 수사가 예고되고 있다.
앞서 감사원은 SK이노베이션측이 성공불융자를 지원하는 한국석유공사와 이를 승인하는 지경부에 로비를 해 상환액을 깎았다는 내용의 제보를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받아 조사했고, 지난달 27일 지경부 공무원 3명, 석유공사 실무자 2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핵심은 SK측이 불법로비를 통해 성공불융자제도 특혜를 받았는지 여부다. 성공불융자제도란 정부가 해외자원개발에 나선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 뒤 사업에 실패하면 일부 융자금을 감면하고 성공하면 원리금과 특별부담금을 징수하는 제도로, 기본취지는 적극적인 투자를 독려하기 위함이다. 해외투자에서 올린 이익을 국내로 돌리는 것은 물론 유사한 자원개발 분야에 다시 투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SK측은 로비설을 일축하면서 “광구개발사업은 단계별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 감사원 조사에서 투자비용이 제외된 액수가 많다”며 “감면액 산정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는 해명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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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프리랜서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