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묻지마 상고… 대법원은 지금 ‘몸살 중’
툭하면 묻지마 상고… 대법원은 지금 ‘몸살 중’
  • 이지혜 기자
  • 입력 2015-04-20 09:27
  • 승인 2015.04.20 09:27
  • 호수 1094
  • 3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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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동아줄 위해 대책 필요하다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대법원이 증가하는 ‘묻지마 상고’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대법원 상고건은 최근 10년 동안 1만 건 이상 증가했다. 대법관 한명당 맡는 사건 수도 증가했다. 그러나 정작 상고건 중 판결 결과가 바뀌는 사건은 5%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 사건들이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법원 입장에서는 이 같은 사건들로 시간을 빼앗겨 난감한 상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각 ‘시간을 끌기 위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심’ 등으로 오늘도 자신의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고 있다. 대법원의 업무 몸살을 해결하기 위해 상고법원 설치, 대법관 증원 등의 의견이 제기되고 있지만 실현은 쉽지 않다.

상고사건 2005년 2만2587건→2014년 3만7562건 ‘껑충’
“부담 줄이기 위해 상고법원 설치” vs “헌법 근거 없어”

최근 대법원 발표에 따르면 상고심은 2005년 2만2587건에서 지난해 기준 3만7652건으로 증가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약 1만 건 이상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대법관 수는 대법원장 포함 13명으로 10년 전과 똑같다. 그러다보니 대법관 1명이 하루에 8.5건을 처리해야 한다. 대법원이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정도로 상고사건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접수 사건 25% 벌금형
“시간 끌기 방법”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 결과가 바뀌는 파기환송률은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5%의 사건들은 기각된다. 실제로 법정에 앉아 판결 선고를 듣고 있으면 대법관들의 “기각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들을 수 있다. 대법원 방청을 위해 법정을 찾은 이모(29·여)씨는 “상고사건에서 기각률이 높은 줄 몰랐다. 직접 와서 들으니 파기 환송한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대법원에 올라오는 형사사건 중 25%는 가벼운 벌금형이다. 2013년 평택의 어느 도로. 좌회전 신호가 켜졌지만 A씨는 이를 무시하고 직진하다 신호위반으로 적발됐다. 경찰은 A씨에게 벌금 6만 원을 부과했다. 즉결심판에도 넘겼다. 그러나 A씨는 정식 재판을 신청해 1심에서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A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1심과 같은 선고를 받았다.   

A씨의 경우처럼 가벼운 벌금형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 상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법조계 관계자들은 “벌금 납부 기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시간 끌기 방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상고를 하지 않으면 항소심이 끝난 후 집행에 들어가는데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가면 그만큼 여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상고심을 신청하면 그들은 선고가 될 때까지 미결수로 인근 구치소에 수감된다. 미결수는 매일 접견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되면 멀리 떨어진 교도소로 이송된다. 때문에 이들 또한 상고심을 ‘시간 끌기’에 이용하는 것이다.

대법원이 이러한 사건들로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정작 충분한 심리와 법률적 해석이 필요한 사건은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실에 따르면 2년이 넘도록 심리가 지연돼 선고가 내려지지 않은 사건은 현재 615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건은 2007년에 접수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의 노조설립신고 반려처분 부당 소송’이다. 해당 소송은 언제 판결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나는 정말 억울하다”
정당하다 주장하는 사람들

그러나 대법원을 찾는 사람들은 이러한 지적에 대해 “정말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을 시간을 끌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마지막 동아줄로 여긴다는 것이다.

네일샵에서 일하는 B(20대·여)씨는 2013년 7월 손님에게 속눈썹연장 시술을 해줬다. 당시 B씨는 손님에게 “시술을 하는 도중 움직이면 눈이 다칠 수 있다”고 말한 뒤 시술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술 도중 손님은 실수로 눈을 움직였다. 해당 손님은 3일 뒤 눈이 너무 아파 응급실에 다녀왔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B씨가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거절하자 이 손님은 B씨를 고소했다.

그리고 1심 재판부는 B씨에게 벌금 70만 원을 선고했다. B씨는 “70만 원은 나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시술 전 분명히 주의할 점을 말해줬고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손님인데 너무 억울했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B씨는 “상고심 판결이 나기 전 손님이 시술 받은 당일 집에서 김장 중 눈에 들어간 고춧가루를 제거하다가 눈이 아파 응급실에 다녀온 사실을 알았다”며 “내가 믿을 수 있는 곳은 대법원밖에 없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가벼운 벌금형에 그치는 상고심 때문에 대법원이 제대로 된 업무처리를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B씨는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엄연한 3심제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대법원까지 오는 것이다. 업무가 밀린다면 그건 상고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대법원 자체의 문제인 것”이라고 반박했다. 

C씨는 지난해 초 대리기사와 다툼을 벌이다 폭행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에서 대리기사는 C씨가 자신을 밀치고 때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씨는 욕은 했지만 폭행은 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블랙박스가 없었고 주변에 CCTV도 없는 지역이라 C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C씨는 “경찰에서 내가 폭행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으면 혐의가 인정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C씨는 재판에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다. 억울한 C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다. C씨는 “혹시나 내 결백이 밝혀지고 판결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상고한 것”이라며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다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상고법원·인력 충원
문제 해결 위한 방안 논의

이에 대법원은 상고심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단순 상고사건을 처리하는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돼 있으나 갈 길이 험난하다. 상고법원 설치를 둘러싸고 반대 목소리도 높기 때문이다.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 신임 회장은 “상고법원은 헌법에 근거가 없다. 상고법원은 국회 임명동의에 따라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법관으로부터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해 삼권분립 정신을 훼손하고 대통령의 최고법관 임명권을 사실상 회피,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회 반응도 미지근하다. 사법제도개선위원회 관계자는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의견 수렴 절차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아직까지 도입에 적극 찬성하는 의원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법원이 생각하는 여론과 법원을 바라보는 국민적 시각에 서로 차이가 있어 급하게 서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회는 이달 내로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한편에서는 대법관 수를 증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전원합의체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대법관이 증원되면 의견 일치가 어려워진다는 지적이다. 한승 사법정책실장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대법원 본연의 기능은 법령 해석 통일 및 정책법원 기능”이라며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법관 전체에 의한 연구, 검토와 진지한 토론이 요구되는데, 사람이 많으면 진지한 토론과 설득이 전제되는 진정한 합의체를 이룰 수 없으므로, 전원합의체에 의한 심리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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