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넥타이 당하죠?” 연쇄살인범도 죽을 날 알았다

“나 넥타이 당하죠?”
당시 24살 청년이었던 조경수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넥타이’는 사형수의 형 집행을 뜻하는 은어였다. 석 달 동안 전국을 돌며 5명을 잇달아 살해하고 40건이 넘는 강도행각을 벌인 연쇄살인범. 그러나 8일 동안 좁은 조사실에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경수는 겁 많은 시골청년에 불과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아. 무조건 사람들 말 잘 듣고 기다려 봐.”
1990년 일명 ‘샛별룸살롱’ 사건으로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 제1호 지명수배자로 악명이 자자했던 조경수와 공범 김태화(당시 22세)는 곧 사형대에 오를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미 여러 건의 살인과 수십 건의 강도, 강간 혐의로 사형 선고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신이 신청한 특별면회가 조경수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전용환 경위(당시 서울시경 형사과 소속)는 알고 있었다. 교도관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고 선물로 준비한 담배 한 보루의 포장을 벗겨 수의를 입은 조경수의 품속에 몰래 숨겨줬다. 그리고 이듬해 조경수 일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그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지요.”
경찰로 살아 온 32년 간 형사보직만을 고집했던 전용환 경위는 그 때의 먹먹한 기억을 털어놓으며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90년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샛별룸살롱 사건’의 알려지지 않은 비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90년 벌어진 ‘샛별룸살롱 사건’은 국내 강력사건 가운데서도 악명 높은 연쇄흉악범죄 사건 중 하나다. 전남 나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경수와 김태화는 이후 2인조 강도단으로 분해 연쇄살인과 강도행각을 일삼다 검거 1년 만에 사형수로 생을 마감했다.
두 달여에 걸친 대대적인 지명수배와 저인망식 수사망을 피하지 못한 두 사람은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지 석 달 만인 1990년 3월 경찰에 붙잡혔다. 은신처를 덮친 수사팀에 조경수가 먼저 검거됐고 공범 김태화는 언론 인터뷰를 요구하며 시간을 끌다 나흘 뒤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체포됐다.
당시 서울시경 형사과 소속이던 전용환 경위는 먼저 붙잡힌 조경수의 조사를 전담했다. 조경수 일당은 다섯 명이 몰살된 두 건의 살인사건 뿐 아니라 수십 건이 넘는 미제 강도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상황이었다.
연쇄살인범과의 8일 밤
“조경수가 붙잡힌 그날부터 제가 녀석의 심문과 조사를 맡았지요. 치안본부 제1호 지명수배자인 데다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흉악범을 빨리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상황이라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건의 충격도는 오늘날의 유영철, 강호순 사건 이상이었다. 불과 석 달 사이에 5명이 살해됐고 서울 각지 미용실 여주인과 여성 손님들이 조경수 일당에게 집단 겁탈당하고 금품을 빼앗겼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피해자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도 죄를 많이 지어서 범죄 사실을 확인하는 데만 꼬박 8일 밤을 샜습니다. 녀석들이 특별히 일기를 써놓거나 메모를 해둔 게 아니어서 무조건 놈들의 기억에만 의존해 범행 일지를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전 경위에 따르면 당시 조경수 일당이 연루된 범죄는 ‘샛별룸살롱’ 사건 등 2건의 살인을 포함해 모두 48건, 이 가운데 38건이 검찰에 의해 혐의가 확정됐다.
일당의 죄를 확인하기 위해 전 경위는 직접 전국단위 경찰서에 특별 공문을 보내 조경수 일당과 수법이 비슷한 미제 사건을 긁어모았다. 순식간에 책상에는 사건 서류가 산처럼 쌓였다. 희대의 살인범들에게 미제 사건을 덮어씌우려는 일선 경찰서 수사관들의 얄팍한 계산도 없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제사건이 많은 부서는 불이익을 당하니까요.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얼추 비슷해 보이는 미제사건을 녀석들 짓으로 몰아붙이면 속은 편할 테니 말입니다.”
전 경위는 전국에서 올라온 유사 사건 기록을 일일이 확인하며 일당의 범행이 맞는지 조목조목 따졌다. 피해자 증언과 현장 사진을 들이대자 조경수도 기억을 더듬으며 수사에 협조했다.
“며칠 밤을 녀석과 새우니 아무리 형사와 범인이라도 말투 하나부터가 살가워지더군요. 범행 동기를 털어놓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지난 이야기를 쭉 듣는데 가슴 한 쪽이 쓰렸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만 왜 녀석들이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지요.”
가난, 배신이 괴물 만들었다
전 경위가 말한 조경수, 김태화 일당은 ‘한 없이 순진했던’ 가엾은 청춘들이었다. 이들의 부모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사춘기 시절엔 학교가 이들에게 ‘문제아’ 낙인을 찍었다. 특히 조경수는 어린시절 호기심에 저지른 한 번의 절도 행각 탓에 고향에서 쫓겨났다고 전 경위는 회상했다.
“조경수가 중학교 2학년 때 이웃이 몰던 오토바이를 호기심에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는데 이것 때문에 처음 절도죄로 처벌을 받았지요.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도둑놈의 자식’이라며 어린 녀석을 동네에서 내쫓아버렸지요. 그 때 어른들이 잘 토닥여주고 타일렀다면 그런 끔찍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고향에서 쫓겨난 조경수는 몇 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음식점 배달부,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소꿉친구이자 후배인 김태화를 만났고 두 사람은 함께 부산으로 건너갔다.
“김태화는 당시 친척이 운영하는 부산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하고 있었는데 조경수와 죽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부산으로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오토바이 퍽치기를 저지르다 나란히 교도소에 가게 됐지요.”
뼈 빠지게 일해도 용돈조차 벌 수 없는 배달부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착각한 탓이었다. 5년 동안 감옥 생활을 경험한 두 사람은 1989년 말 출소했다. 1990년 새해 첫날, 두 청년은 새 각오를 다졌지만 ‘패배자’ ‘실패한 인생’이라는 꼬리표는 지겹게 따라 붙었다.
“감옥에서 5년을 썩고 안 그래도 열등감에 똘똘 뭉쳐있는데 술집 여종업원이 그 상처를 건드린 겁니다. ‘팁이 적다’ ‘마음에 안 든다’고 이죽거리는 종업원에게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이지요.”
새해 첫날, 전남 광주의 한 술집에서 두 사람은 여종업원과 업주에게 칼부림을 했다. 결국 여종업원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여사장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피해자의 진술 덕에 당시 광주 서부경찰서는 조경수, 김태화의 신원을 확보해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이는 결국 일당의 막가파식 행보를 자극하는 도화선이 됐다.
“2차 안가서 살해? 사실 아니다”
광주에서 사람을 죽인 조경수와 김태화는 서울 구로 인근 쪽방촌에 숨어들었다. 경찰 수사망이 좁아질 것이 두려워 한 달 넘게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두 사람은 늦은 밤 은신처 근처에 있던 ‘샛별룸살롱’을 드나들며 술로 두려움을 이기곤 했다.
“쪽방촌에 숨어 지내며 일당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었습니다. 이미 전국에 지명수배 전단이 뿌려진 탓에 취직을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도둑질한 돈으로 밤에 샛별룸에서 술 한 잔 걸치는 게 이들의 낙이었습니다.”
두 번째 비극의 무대가 된 샛별룸살롱. 하룻밤 새 10대 남녀 4명이 도륙당한 그 곳은 특히 조경수에게 단순한 술집,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전 경위는 8일 간의 밤샘조사 과정에서 조경수로부터 ‘진짜 범행동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때 숨진 네 사람 가운데 18살 먹은 여종업원 한 명은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다른 희생자들은 일찌감치 숨이 끊어졌는데 그 아이 하나만 용케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지요.”
당초 경찰 수사 발표와 언론에 따르면 희생자 네 명은 아침 일찍 출근한 주인 부부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모두 흉기에 난도질당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조경수와 김태화는 범행 당일 샛별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다 여종업원들에게 ‘2차’(성매매)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둘렀다는 게 당시 경찰의 공식 발표였다.
그러나 전 경위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살아남아 숨을 몰아쉬던 피해자 김모(당시 18세)양. 조경수는 전 경위에게 “김양을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전 경위에 따르면 조경수는 좀도둑질로 마련한 자잘한 귀금속 등을 처분하지 않고 공범 김태화 몰래 김양에게 선물하곤 했다. 지명 수배된 상황에서 당장 도피자금이 궁함에도 여인의 환심을 사려했다는 얘기다. 전 경위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범행 당일에도 조경수는 김양에게 자잘한 선물을 하며 마음을 고백했는데 완전히 무시당했답니다. 분에 못 이겨 김양의 뺨을 한대 때렸는데 여주인이 나서 욕을 하며 자신들을 쫓아냈다더군요.”
조경수와 김태화가 원래 죽이려했던 것도 여종업원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내쫓은 여사장이었다고 전 경위는 전했다. 그러나 새벽녘 이들이 샛별룸살롱을 다시 찾았을 때 주인은 없었다. 대신 김양과 또 다른 여종업원이 또래의 젊은 남자 2명과 노닥이고 있었다. 이를 본 조경수는 이성을 잃었고 참혹한 살인극이 벌어졌다.
“이상한 건 도망치는 다른 피해자들의 머리채를 잡아 확인사살을 할 정도였으면서 김양은 제법 오래 살려뒀다는 점입니다. 김양 역시 경찰들이 병원에 옮긴 지 얼마 안 돼 숨을 거뒀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살인마의 칼도 무뎌진 탓이겠지요.”
#리얼스토리 talk box 전용환 경위
서울시경 강력, 폭력계 섭렵한 ‘골수 형사’
“은퇴 직전까지 살인사건 현장서 밤새워”
전용환 경위는 지난 1996년 서울 노원경찰서 강력2반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대부분의 노장 수사관들이 은퇴를 앞두고 감찰, 보안부서 등 내근직을 선호하는 것과는 반대다. 스스로 “마지막 날까지 형사로 뛰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는 전 경위는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며 멋쩍어했다. 1964년 서울 청량리경찰서 순경으로 입문해 남대문경찰서, 서울시경 등을 거친 그는 퇴직 한주 전까지도 살인사건 현장에서 밤을 새운 ‘골수 형사’다. 서울시경 형사과에서만 13년을 근속한 전 경위는 80년대 중후반 폭력계 전담 형사로도 명성을 날렸다.
- 최근 방송인 강병규 폭행 사건과 관련해 조폭이 배후에 있다는 풍문이 돌았었다. 경찰은 “사건 연루자 가운데 조직폭력배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 경찰이 말하는 조직폭력배는 일반인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조직 강령과 돈줄을 담당하는 자금책이 명확히 존재해야 조직폭력배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이 기준을 만족해야 경찰 관리대상에 포함된다. 그것도 조직 규모와 폭력성에 따라 A급, B급 등으로 구분해 따로 관리한다. 전국 각지의 조직폭력배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시경(현 서울지방경찰청)이 전국의 폭력조직을 모두 관리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직시절 우리 부서가 관리하던 폭력조직은 줄잡아 120개가 넘었다. 지금은 이와 비슷한 숫자이거나 조금 줄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폭력조직이 가담했다기 보다는 군소 깡패나 일반인들일 가능성이 많다.
- 32년 동안의 형사 생활 가운데 가장 아쉬웠던 사건이 있다면.
▲ ‘샛별룸살롱 사건’이 범인에 대한 연민 때문에 안타까웠다면 1980년 벌어진 ‘이윤상 유괴살인사건’은 눈 앞에서 범인을 놓아주는 실수를 범했기에 기억에 사무친다. 시경 강력반장 시절이었는데 유력한 용의자였던 교사를 데려다 심문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후배 형사에게 “그래도 의심스러우니 미행해보라”고 지시했지만 “설마 선생이 제자를 죽였겠느냐”고 하는 바람에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히 진범의 혐의가 밝혀져 사건은 해결됐지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실수였다. 후회스럽다.
- 2000년대 이후 첨단 과학수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일부 젊은 형사들이 이를 믿고 탐문 등 과거 수사기법에 소홀하다는 지적도 많다.
▲ 형사들이 발과 눈으로 잡아내지 못하는 세밀한 부분을 과학수사가 훌륭히 채워주고 있다. 과학수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형사가 담당하는 수사영역과 과학수사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다. 흔히 형사를 ‘곰’이라고 하지 않나. 우직하게 한 자리를 지킨다는 뜻이다. 부지런한 형사는 단서 하나 없는 사건 현장에서도 범인을 짚어낸다. 후배들이 절대 잊지 말았으면 한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윤상 유괴살인사건
1980년 11월 13일, 누나 심부름을 갔던 14세 중학생 이윤상군이 같은 학교 체육교사 주영형에 의해 유괴, 살해된 사건이다. 주는 62회에 걸쳐 이군 집에 협박편지와 전화를 걸어 4000만원의 몸값을 요구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쉽게 잡히지 않다가 사건 발생 1년 만인 1981년 11월 30일 이 군이 다니던 중학교의 체육교사 주영형이 범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주는 중학교 교사이면서도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교사 신분으로 어린 여제자들과 불륜 행각을 벌였고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이군을 유괴, 살해했다. 이 과정에 그와 불륜관계였던 여고생 두 명이 공범으로 밝혀져 함께 구속됐다.
주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계속 항소·상고하였으나,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1983년 7월 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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