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용산 부지 이전 둘러싼 찬반
겨우 새 박물관 부지를 확보했더니 이제 반대론자들은 “용산 부지는 골프 치러 자주 갔는데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더라”며 “습지와 같은데 거기 박물관을 새우면 유물이 모두 손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강과 아주 가까워 한강이 범람하면 또한 물바다가 될 것이니 절대로 부적합하다”고 우겨댔다.
그뿐 만이 아니라 “수십만 점의 유물을 두 번씩 옮겨 다니면 유물에 손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특정한 언론사는 “총독부 건물 철거비용이 3000억 원이나 되는데 막대한 예산을 들여 그 위대하고 아까운 건물을 왜 허물어야 하는 가”라며 연일 철거 반대의견을 쏟아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고 일부러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첫째로 용산 부지가 습지와 같다고 하고 한강과 가까워 매우 위험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방대한 수의 유물을 왜 두 번씩 옮겨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했다. 이 문제는 앞서 설명했듯이 경복궁 동남쪽 주차장 지하에 있는 1600 평대의 안전한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 창고는 지금도 고궁박물관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유물은 안전한 창고에 그대로 있고 전시품과 사무실만 옮기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 왕궁 박물관은 같은 경복궁 남쪽 경내에 바로 이웃하고 있으므로 전시유물과 사무실 이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철거비용이 3000억 원이 들므로 예산낭비라는 지적이다. 우리는 총독부 철거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용산에 큰 박물관을 세워야하므로 우리에게 쥐어진 책임과 업무가 너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왕궁 박물관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지하의 거대한 창고 관리도 철저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본부, 계획원, 예산처, 국회, 청와대 교문수석실을 오가면서 좋은 집을 짓기 위한 예산획득에 전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그래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조선 왕궁 박물관과 동쪽 광장에 있는 지하창고를 연결하는 연결통로를 만들기로 했다. 유물을 동쪽 지하창고에서 들고 나와 조선왕궁 박물관까지 어렵고 불안하게 옮겨오고 또 격납할 때는 반대로 옮겨야만했다.
연결통로를 만들려면 경복궁 서남쪽의 지하에서 경복궁을 가로질러 동남쪽 지하창고까지 거의 200m쯤 지하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동남쪽 창고는 지하 15m쯤에 있으므로 지하통로와 지하창고를 연결 짓는 3층 규모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꽤 넓은 닥트건물이 지하에 있어야만 했다. 실제로 철거비용은 약 30억 원밖에 들지 않았지만 이러한 비용이 합쳐져서 200억 원가량의 예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3000억 원이 아닌 200억 원의 비용으로 동서의 수장고를 연결하는 안전한 지하 통로가 생기고 밀차에 실어 안전하게 유물의 이동이 가능하게 했다. 이 연결통로가 경복궁 지하를 파고 설치한다 해 문화재 위원회 매장문화재 사적분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무슨 심산인지 두 번이나 부결시켜 마지막으로 본인이 직접 가서 상세히 설명하고 유물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재 역설해 겨우 허가를 받았다.
1994년 7월27일 경복궁내 조선왕궁 박물관 기공식이 있었고 1996년 12월12일 개관까지 모든 전시유물과 사무실이전이 완료됐다. 개관하기 전 개관준비를 하면서 총독부건물 철거준비 작업을 면밀하게 진행했다.

청화백자 죽국문각병
18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높이27.5cm (박병래 기증)
조선조에서 숙종·경종·영조·정조 연간은 우리문화가 독창성을 확립해 나간 시대다. 도자사에서 보면 숙종·경종·영조 20년대까지가 독창성이 가장 크게 발휘되던 시기다.
문화는 교류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므로 독창성이 크게 발휘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문화의 독창성이 크게 진작되려면 위정자와 국민 모두가 자기 문화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하여도 깊이 이해하고 섭렵해 나가야 가능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크나큰 피해와 혼란을 야기했지만 명에 대한 사대에 지나치게 기울어있던 조선사회에 명에 대한 회의와 청과 일본 등 주변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찾고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 겸재가 우리 그림을 그려 진경산수가 크게 진작했고 뒤이어 단원과 혜원이 우리 산하와 우리 풍속을 절묘하게 그렸다. 이 대나무와 들국화를 그린 각병은 바로 겸재의 진경산수가 완숙할 때인 18세기 전반에서도 중엽에 가까운 때로 우리의 독창적 백자 색택과 조형과 문양이 한껏 아름답게 빛나던 때에 만든 것이다. 백자의 색택은 눈처럼 희고 조형은 준수하고 문양은 간결하고 청초하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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