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지/금] 투서에 벌벌떠는 기업들
[재/계/는/지/금] 투서에 벌벌떠는 기업들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5-04-13 10:23
  • 승인 2015.04.13 10:23
  • 호수 1093
  • 2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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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항상 가까운 곳에? ‘동료가 무섭다’

▲ <뉴시스>


   내부 제보로 수사 시작돼 기업 비밀곳간까지 털려
   인지 수사에 혀 내두른 재계…직원 간 신뢰 무너져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재계가 전방위적 사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가운데  각종 ‘설’과 ‘투서’들이 난무하면서 더욱 힘든 상황이다.
투서 대부분이 수뇌부를 직접 겨냥한 것이거나 추진하는 사업의 깊은 곳(?)을 겨낭하다보니 이로 인한  피해가 심각하다. 일부 투서의 경우는 악의적인 내용을 담은 ‘무고’ 성격의 글도 있어 가뜩이나 갈 길 바쁜 기업들이 내부 단속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가족들보다 더 오랜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회사 동료다. 그런데 이들이 무섭다." A대기업 직원이 취재진에게 한 말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더욱 충격이다.

인사에 불만을 품은 동료직원이 해당부서 팀장에 대한 투서를 냈고, 이로 인해 팀장이 한직으로 물러났다는 이야기였다.
잘못을 했다면 처벌 받는 게 당연한 것이니 동료가 잘 한 것 아니냐고 재차 묻자 A씨는 “관행이었다"는 믿지 못할 말을 전했다.

부서 팀장이 개인적인 사욕을 위해 불미스러운 일에 관여한 것이 아니라  팀을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부정(?)이었다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쉬쉬하면서 묵인할 정도의 일이었다는 것. 그런데 이를 공론화하자 사측이 파면이 아닌 인사조치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직원 간의 신뢰가 깨졌고, 이와 유사한 일을 행했던 타 부서에서도 팀장과 직원 간 불편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나마 이 일은 직원 간의 불협화음으로 마무리된 정도다. 한 장의 투서가 기업 전체를 흔든 사례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근 수사가 한창인 포스코사태다. 현재도 포스코는 각종 투서와 제보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주로 포스코 퇴직자와 징계 대상자, 납품에서 탈락한 협력업체, 정치권 등이 주요 진원지로 지목되고 있다. 검찰에도 몇 년 전부터 이들이 제보한 각종 투서가 상당 분량 축적돼 있고, 이번 수사에 활용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썩은 물 뒤지기도

포스코 전직 고위 간부의 해외 접대 사건, 전직 고위 간부의 자녀 호화 결혼식 사건, 주요 공법 활용한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이 이들의 투서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박현정 전 대표의 사퇴를 불러온 것도 익명투서가 발단이 됐다. 지난해 12월 불거진 ‘폭언, 인사전횡, 성추행’등을 담은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홍역을 앓았다. 박 전 대표는 현재 투서 작성자를 처벌해달라며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다.

일광공영을 수사중인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단장 김기동 검사장)도 투서의 내용 확인을 통해 이 업체의 로비 의혹 수사를 본격화했다. 특히 일광공영은 무기 중개업계에서 명성이 높은 ‘메이저 업체'로, 합수단의 활동 개시 이후 수사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줄곧 제기돼 왔다.
합수단은 소문 단계에 머물던 일광공영 로비 의혹을 뒷받침할 범죄 단서를 상당수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첩보 수집에 집중해오던 합수단이 이 회장을 전격 체포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투서는 인사철이면 더욱 극성을 부린다. 경쟁자를 떨어뜨리고 본인이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평소 잘 따르는 부하 직원을 시키기도 하고, 외부 사람을 이용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기업 감사팀 직원은 “투서가 종종 들어오지만 인사철이 되면 건수도 많아진다”면서 “익명 투서는 무시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경우는 참고 자료로 갖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구체적으로 심증이 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은밀히 감사를 벌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투서는 대부분 음해성으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했다. 관급공사를 많이 수주하는 기업도 투서로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은다.

‘…카더라, …한다더라’와 같이 팩트가 분명하지 않은 의혹 제기가 많다는 것. 담당 부서는 조사나 입증이 힘든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사라져야 할 관행

문제는 이 같은 투서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후폭풍이 상당하다. 기업 곳곳의 비밀장소까지 파악한 후 수사를 진행하다보니 먼지 하나까지 다 털어간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과거 모 회장의 비밀금고 위치와 비밀번호 를 정확히 파악한 검찰이 순식간에 들이닥쳐 금고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간 일화도 있다.
반대로 악의적인 투서로 밝혀져도 해당 기업엔 상처로 남는다는 것이다. 직원 간 신뢰가 무너지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웃지못할 일도 발생한다.

따라서 투서는 행정력 낭비뿐 아니라 불신을 조장하는 근원이라는 점에서 사라져야 할 관행이고, 잘못된 행위로 치부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필요악’이란 주장도 나온다.
총리실이나 감사원 등에서 공직 비리 행위를 적발할 수 있는 것도 투서나 제보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음해성 투서는 선의의 피해자들이 나오고,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행정력이 낭비된다”며 “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호법 등에 따라 제보·고발자의 이름을 떳떳하게 밝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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