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정팀 ‘개인비리는 없고 업무상 실책은 있더라’ 보고
세계일보 포스코 건설 비자금 보도로 혼쭐…압박 본격화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저는 포항에 올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어렵고 힘들던 시절에 포항에서 시작된 중공업의 역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을 만든 초석이었다.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헌신하고 땀 흘린 분들이 바로 여기 모여 계신 포항시민 여러분들이시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포항 유세에서 한 말이다. ‘철강 신화’를 이끌어 낸 포항과 포스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자부심도 묻어 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와 함께 3차례, 국회의원 시절 3차례 포스코(옛 포항제철)를 방문하기도 했다.
박근혜 후보가 유세를 마치자 한 포항 시민은 44년 전인 1968년 포항제철 완공식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온가족이 내려와서 축하한 사진을 비롯해 박근혜 후보와 포항의 인연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전달했다. 또 다른 시민은 박근혜 후보의 대선승리를 기원하며 포항의 대표 음식 과메기 등을 건네며 응원하기도 했다.
포스코에 대한 애정 듬뿍
이렇듯 박근혜 대통령과 포항, 포스코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러나 지금은 포스코가 사정 칼날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검찰의 포스코 비자금 수사반경이 건설 분야에서 철강 분야로 넓혔다. 포스코건설 비자금 의혹을 파헤치더니 지난 7일 포스코 협력업체인 코스틸 포항 공장과 박재천 코스틸 회장 자택 등 10곳을 압수수색했다. 포스코와의 불법거래 및 비자금 조성 여부 등을 수사 중이다. 포스코의 다른 협력업체들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다. 검찰의 최종 타깃은 포스코 그룹 전체가 될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에 대한 전방위 압박은 이완구 국무총리가 선포한 ‘부정부패와의 전쟁’ 일환이다. 성완종 전 회장의 자살까지 몰고 간 경남기업에 대한 해외자원개발 수사, 일광그룹 이규태 회장을 구속한 방산비리 수사도 같은 차원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포스코와 관련업체들을 겨냥한 수사의 강도가 세다. 박정희·박근혜 부녀 대통령이 진한 애정을 보인 포스코가 코너에 몰린 까닭은 무엇일까.
일단은 박근혜 대통령이 포스코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관측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포스코에 대한 수사는 대통령의 ‘하명(下命) 사건’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포스코의 비리를 발본색원하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의미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은 왜 포스코를 사정 대상 1호로 지목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가장 큰 이유는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조국근대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포스코가 비리의 온상처럼 비쳐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으로 보인다. 포스코는 1965년 한일협정 타결 후 일본이 우리나라에 제공한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일부로 건설됐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 큰 결단이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서거할 때까지 포스코를 13번이나 찾았다. 포스코 신화는 ‘박정희 연출, 박태준 주연’으로 완성됐다.
흉상 건립 등 우상화 시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포스코 신화=박태준 신화’로 인식됐다. 특히 박태준 전 회장이 1997년 대선 때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으로 김대중 정권 창출에 일조하고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포스코 신화에서 ‘박정희’ 이름 석 자가 들어갈 틈이 좁아졌다. 빅 히트를 친 명화에서 감독은 부각되지 않고 주연배우만 기억에 남는 상황과 비슷하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예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대목은 검찰의 최종 타깃으로 보이는 포스코의 정준양 전 회장도 ‘박태준 우상화’에 열성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정 전 회장은 서울 강남구 포스코 사옥 1층에 거대한 박태준 흉상을 세웠다. 포항광양제철소와 포스텍(포항공대) 등에도 여러 개의 흉상을 만들었다. 당시 생존 인물의 흉상을 세우는 일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도 일어났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의문점이 생긴다. 정 전 회장은 2009년 2월 포스코 수장 자리에 오를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박태준 전 회장이 미는 윤석만 전 포스코 사장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정 전 회장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정준양 회장 출범 과정에서 박태준파와 정권 실세들의 파워 게임이 벌어졌던 셈이다.
그럼에도 정 전 회장이 자신의 회장 선임에 적극 반대했던 박 전 회장을 우상화 한 이유는 뭘까. 포스코 관계자들은 “조직 내에 광범위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박태준 세력’에 유화 제스처를 보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정통 포철맨인 자신의 뿌리를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이 대목도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이 지워지고 박태준 신화만 강조되는 상황으로 흘러간 까닭이다. 물론 박태준 흉상 제작 같은 심정적 불만을 포스코를 겨냥한 대대적 사정의 한 요인으로 간주하는 건 무리가 있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이 흐려지는 시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 때 포스코를 이끌었던 정준양 체제에서 극심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포스코가 정치외풍을 타는 일을 안타까워하면서 청와대 민정라인에 정준양 체제의 포스코를 조사해 보라는 ‘밀명’을 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민정팀은 내사 끝에 ‘경영부실은 파악했지만 비리는 찾지 못했다’는 요지의 보고를 했다는 말도 들린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정 전 회장의 무리한 기업 인수합병이 그 당시 이미 파악됐었다는 의미다.
이명재 특보 발탁에 주목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포스코에 대한 내사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 대통령이 1월 23일 이명재 전 검찰총장을 민정특보로 발탁한 일도 예사롭지 않다. 이 특보는 기업비리 수사에 밝은 ‘특수통’이다. 포스코와 경남기업 등이 처음부터 타깃이었다면 이 특보 기용은 ‘맞춤형 인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특보 취임 이후에도 포스코 내사는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건 2월 26일 ‘세계일보’의 특종 기사였다. ‘포스코 주력계열사인 포스코건설 해외 건설현장 임원들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 중 일부를 횡령한 정황이 포스코건설 자체 감사에서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도가 나간 후에도 검찰이 포스코건설을 수사하고 있다는 후속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이완구 국무총리가 3월 12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며 사실상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총리는 구체적 부정부패 사례로 △방위사업 비리(불량 장비·무기 납품, 수뢰 등) △해외 자원개발 배임·부실 투자 논란 △일부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과 횡령 △개인의 이익을 위한 공적 문서 유출 등을 적시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총리의 대국민담화 발표 다음날 검찰이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를 통해 포스코건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며 본격적인 기업비리 수사의 신호탄을 쏘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세계일보’ 보도를 전후해 검찰이 포스코건설을 면밀히 내사해 오다가 부정부패와의 전쟁 선포와 거의 동시 행동에 나섰음을 읽게 한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진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민정라인이 ‘비리는 찾지 못했다’고 보고한 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일보’ 보도로 인해 부실한 조사 결과를 내놓았음이 확인된 셈이기 때문이다. 민정팀이 혼쭐이 났고 이후 검찰과 협조해 포스코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한 것으로 관측된다.
결국 포스코건설 비자금 의혹을 계기로 검찰은 포스코그룹 전체를 겨냥한 전방위적인 수사에 나서 있는 상태다. 하지만 수사 개시 한 달이 다 되도록 몸통(정준양 전 회장)의 개인비리는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이 포스코에 선재를 납품하는 코스틸의 서울 사무실과 포항공장을 압수수색하면서 답보 상태에 빠져 있던 수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정준양 전 회장의 비자금 조성 같은 개인비리를 찾아낼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여기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가 예정된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대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더구나 성 전 회장이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10만달러, 허태열 전 비서실장에게 7억 원을 줬다”고 폭탄 발언을 하는 바람에 정국 풍향계가 일순간에 뒤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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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