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 아니었다” 치밀한 거짓말?

2009년을 불과 일주일 남기고 벌어진 끔찍한 패륜범죄에 전국이 술렁인 한주였다. 미궁에 빠질 뻔했던 전남 영암 공무원부부 피살사건의 진범인 큰 아들 김모(24)씨가 범행 닷새 만에 검거됐지만 범행 동기를 놓고 논란이 여전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진술과 달리 잔혹한 살해수법과 범행직후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현장을 어지르고 귀중품을 훔치는 등 범행 과정이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인 까닭이다. 일단 부친의 주사와 가정폭력이 빚어낸 우발적 범죄라는 데 수사팀 의견이 모이고 있지만 지체장애를 가진 어머니까지 살해한 이유는 경찰도 명확한 답을 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김씨 부모가 각각 6급 공무원과 서예학원장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있었고 인근 상가건물까지 소유할만큼 부유했다는 점에 주목할 만 하다. 또 김씨는 4년 전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 부친이 거액의 보상금을 대신 문 적도 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미뤄 범행당시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는 김씨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믿기엔 한계가 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사건 내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그 내막을 추적했다.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밤 11시. 전남 영암군 영암읍의 한 단독주택이 피로 물들었다. 영암군청 6급 공무원 김모(51)씨와 아내 조모(50)씨가 처참히 살해당한 것. 범인은 김씨의 머리를 둔기로 10여 차례 내려친 뒤 흉기로 조씨의 온 몸을 총 31번이나 찔렀다.
치밀한 범행 끝 느닷없는 자백
참혹한 살인극의 현장은 나흘 동안 방치됐다. 김씨 부부의 시신은 크리스마스 여행을 약속한 동료 공무원 부부에 의해 뒤늦게 발견됐다. 충격적이게도 부모를 살해한 큰 아들은 시신을 방치한 채 애인과 친구 집을 오가며 성탄절 연휴를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범행 상황은 이렇다. 크리스마스이브 밤 11시경 족구동호회 회원들과 운동을 한 뒤 회식에 참석했던 큰 아들은 집에 돌아와 모친이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평소 주사가 심했던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고 따졌고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그는 이성을 잃는다.
몸싸움 끝에 둔기를 집어든 장남은 아버지의 머리를 겨냥해 10여 차례 이상 휘둘렀고 모친은 이를 말리기 위해 달려든다. 지체장애인으로 하반신이 온전치 않은 어머니가 아들의 만행을 말릴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치명상을 입은 아버지가 쓰러진다. 여기까지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자녀가 폭행 가해자에게 행할 수 있는 분노의 폭발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다음 상황이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자신을 만류하는 어머니를 무려 31번이나 찔러 살해한다. 이웃들에 따르면 김씨는 대학 재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보탤 만큼 살뜰한 아들이었다. 특히 몸이 불편한 모친과 사이가 각별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이 저항 능력조차 없는 친어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이다.
더욱 미심쩍은 것은 양친을 죽인 직후 김씨가 택한 행동이다. 김씨는 마치 집에 강도가 든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부러 현장을 어지럽히고 귀금속 30여점 등 금품을 훔쳐 빠져나왔다. 살해도구를 구한 것부터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상황을 조작한 것으로 미뤄 우발적 범행이라는 김씨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김씨는 범행 후 여자친구가 있는 광주로 도주해 성탄절을 보냈다. 이후 시신을 발견한 부모 친구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영암으로 돌아온 그는 경찰에서 태연히 유족 조사를 받다 심경 변화를 일으켜 범행 일체를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란·유복한 가정, 겉보기에만?
이웃 주민과 일부 언론에 따르면 김씨 가족은 유복한 환경에 둘러싸인 단란한 가정이었다. 평소 김씨 가족은 이웃들과 왕래가 많지 않은 조용한 성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는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독주택을 소유할 만큼 살림이 윤택했다. 이웃들은 숨진 피해자들을 “집에서 싸우는 소리 한번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만큼 점잖은 인물들”로 평했다.
특히 부부는 각자 직업이 있었고 인근 상가건물을 임대해 적잖은 수익을 올릴 만큼 풍족했다. 범행을 저지른 김씨는 영암 지역에 위치한 대학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할 만큼 알뜰했다는 게 이웃들 전언이다.
주민들이 이번 사건에 충격을 금치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봐도 완벽한 가정에서 존속살인이라는 끔찍한 범행이 저질러졌다는 것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아들 김씨가 충동적인 분노뿐 아니라 유산을 향한 욕심에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특히 2005년 갓 면허를 딴 김씨가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 부친이 수 천 만원에 달하는 보상금을 대신 물어주는 바람에 갈등이 있었다는 진술 내용을 주목해 볼 만 하다.
한편 경찰은 김씨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와의 갈등이 이번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모친을 살해한 것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유일한 목격자인 어머니를 없애기 위함이라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김씨가 환각 등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정성국 강원지방경찰청 검시관 등이 최근 한국법과학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전체 존속살인 사건 가운데 과반수에 육박하는 43.1%가 정신분열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으로 기억될 살인극의 동기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가능성은 세 가지다. 우리가 모르는 가족 내 비틀린 불화가 첫째고, 돈을 노린 아들의 탐욕이 둘째, 마지막은 장남의 이성을 집어삼킨 정신질환 탓이다.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정신분열 앓는 자녀, 부모에겐 공포의 대상
한국법과학지 “존속살해 사건 중 43.1% 정신분열이 원인”
정신분열을 앓는 자녀가 부모에게 있어 심각한 위험을 끼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정성국 강원지방경찰청 검시관 등이 최근 한국법과학지에 발표한 ‘살인사건 중 존속살해와 정신 분열의 연관성 분석’ 논문에 따른 것이다,
정 검시관 등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2009년 6월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1734건의 살인사건 중 존속살인은 72건으로 전체 살인사건의 4.2%를 차지했다. 정 검시관은 “연평균 매년 50건 내외의 존속살인이 발생하며 전체 살인사건에서 약 5% 정도”라고 밝혔다.
특히 동기 부분에서 존속살인 ‘정신분열’에 의한 것이 43.1%를 차지해 ‘언쟁 중 우발적 살인(19.4%)’, ‘계획적인 살인(4.2%)’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일반 살인사건에서 정신분열증에 의한 살인은 3% 수준이다.
정 검시관은 “부모를 살해하라는 ‘지시적 환청’이나 부모가 괴물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망상성 정신분열’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며 “한국의 부모 자녀 간 관계가 깊고 외국과 달리 대부분 가정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를 관리하고 있다. 접촉이 많다 보니까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살인도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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