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여동생 등록금 대려 도둑질… 범죄꾼 전에 인간”

찢어지는 가난과 못 배운 설움이 무엇인지, 20대 초임 순경은 미처 모를 때였다. 1974년 늦겨울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그저 스쳐지나가는 범죄꾼 중 한명에 불과했던 청년은 또래인 젊은 형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아픈 여동생이 있습니다. 죄는 모두 이실직고할 테니 제발 동생만 모르게 해주십시오.”
신출귀몰한 솜씨 탓에 관할 내에서는 골칫덩이로 통하던, 청년은 ‘도둑’이었다. 훔친 장물 등 증거 수색을 위해 범인의 집을 뒤져야 하는 상황에서 도둑은 한사코 자신의 집에 형사들을 들이길 꺼려했다.
“그 녀석 혼자 버텼다면 무시해버렸을 텐데 같이 잡혀온 일당들마저 ‘훔친 물건은 다 찾아드릴 테니 저 친구 집은 참아 달라’고 해 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히 증거를 없애거나 형량을 가볍게 하려는 ‘잔머리’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눈물 콧물 쏟아내며 형사들에게 매달리는 도둑에게 형사반장이 손을 들었다. 반장은 당시 새내기 순경이었던 지승택 경위를 은밀히 도둑의 집으로 보냈다. 무슨 상황인지 살피라는 뜻이었다. 내사에 착수한 지 경위는 곧 도둑의 눈물과 애원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명문대 3학년으로 ‘미래의 약사’를 꿈꾸는 꽃 같은 여대생이 ‘노점일 나간’ 친오빠를 며칠 째 뜬 눈으로 기다리는 게 아닌가. 부모와 사별하고 천둥벌거숭이로 남은 남매에게 오빠는 살림을 책임질 가장이자 여동생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그리고 오빠는 서울 서부지역에서만 수십 건의 절도사건을 일으킨 ‘도둑’이었다.
1972년 8월 서울 서부경찰서 형사4계에서 경찰 생활을 시작한 지승택 경위의 이력은 다소 독특하다. 초임 근무를 한 곳에서 무려 27년 동안이나 그것도 강력사건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형사는 그가 유일하다시피하다.
첫 발령 이듬해인 1973년 각 경찰서 정예부대인 ‘330 수사대’에 발탁된 지 경위는 이후 서부경찰서 특수반과 강력반을 오가며 발군의 수사실력을 뽐냈다. 특히 강·절도사건에 있어 남다른 감각을 선보인 그는 관내 절도범들에게 있어 ‘공포’ 혹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도둑과 여대생
서부서 재직 시절, 그의 손을 거쳐 해결된 사건만 3000여 건. 서울 은평구 일대에서는 ‘지 형사 때문에 손 씻었다’는 도둑들이 수두룩했다. 30년 가까이 같은 서에서 근무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 경위는 빙긋 웃었다.
“그때만 해도 서부서 관할 지역은 못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남의 것에 손대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가 대부분이었지요. 범죄꾼 잡아놓고 보면 누구하나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없었지요. 딱한 사정을 잘 아는 형사가 하나라도 더 있어야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죄는 밉지만 보듬을 수밖에 없는 딱한 범죄꾼. 지 경위는 초임 형사 티를 갓 벗을 무렵 자신의 손으로 수갑을 채운 청년의 사연을 잊을 수 없다. 그가 30년 가까이 ‘변두리 형사’로 묶인 것도 그 때의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못 잊은 탓이다.
“제가 서부경찰서 330 수사대에 있을 때니 1974년, 경찰 제복을 입은 지 2년이 갓 넘을 때군요. 녀석들을 붙잡은 건 미아리의 허름한 지하샛방이었습니다. 추적 중이던 절도범 일당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출동했지요.”
지 경위를 포함해 형사 3명이 급습한 아지트는 비좁았다. 그 좁아터진 샛방에서 일당 3명은 훔친 장물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을 보고 당황한 절도범들은 격렬하게 반항했다. 잡히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통에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어 맨몸뚱이인 형사들을 위협했다.
“정말 제압하는 과정은 피가 튀었지요. 어떻게든 안 잡혀야 한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격투 실력은 형사들이 한수 위. 3:3으로 맞붙은 혈전에서 기선을 잡은 형사들은 각각 범인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압송했다. 일단 아지트에서 나온 장물과 일당의 자백으로 피해 품목을 맞춘 형사들은 여느 때처럼 범인의 집을 수색하기위해 나섰다.
도둑질로 댄 등록금, 여동생은 몰라
“나머지 장물과 증거물을 찾기 위해 녀석들을 대동하고 가택수색을 나갔는데 난리가 난 겁니다. 처음엔 ‘여동생이 많이 아프다’고 하더군요. 충격을 받으면 위험하니 제발 자기 집은 빼달라고 애걸복걸했지요.”
지 경위의 내사로 밝혀진 남매의 사연은 그야말로 딱했다. 도둑의 이름은 여수찬(가명·당시 26세). 일찍 부모를 여읜 여씨는 여동생과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남매는 여씨가 어린 시절부터 시장 잡일꾼으로 일한 덕에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만큼 살림이 어려웠다.
“여동생이 공부를 무척 잘한 모양입니다. 대학에 갈 실력이 충분히 되는데 문제는 한두 푼도 아닌 등록금을 구할 길이 없었다는 거였지요.”
시장 잡일로는 도저히 여동생의 등록금을 댈 수 없었던 여씨는 결국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로 작정했다. 친구 2명과 빈집털이에 나선 여씨는 훔친 물건을 팔아 이 돈을 고스란히 여동생 학비로 건넸다. 여동생에게는 ‘남대문 시장에 자리를 얻어 시계노점상을 하게 됐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다섯 학기를 마칠 동안 여동생은 오빠의 진짜 직업을 몰랐다. 시장에서 밤늦게 장사를 한다는 오빠는 매번 번쩍거리는 시계를 가방에 잔뜩 챙겨 들어왔고 학비며 용돈을 알뜰하게 챙겼다.
경찰에 붙잡힌 여씨는 “여동생이 학교만 졸업하면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으려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고 한다. 명문대생인 된 여동생에게 못난 모습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나중에 결국 사실을 알게 된 여동생이 경찰서에 찾아오면서 남매는 어색한 해후를 하게 됐지요. 서럽게 우는 남매가 어찌나 가엾던지 그때 강력반 형사들 모두 몰래 눈물을 훔칠 정도였습니다.”
특수절도 혐의로 여씨가 검찰에 넘겨진 뒤 사연은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도둑과 여대생’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 도둑 오빠의 서글픈 뒷바라지는 훗날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아마 제목이 <저 하늘의 별들>일 겁니다. 탤런트 송재호씨가 도둑 오빠 역할을 맡았고 최불암씨가 형사반장으로 분했지요. 여동생 역할은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인 신인 여배우가 맡았는데 사실 크게 흥행은 되지 않았습니다.”
계엄사 간부에 권총 위협 당하기도
지 경위는 인터뷰 중 20년 간 강력계 파트너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선배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전·현직 강력계 형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수사관으로 꼽히는 인물, 바로 최율식 반장이다. 90년대 서울시내에서 벌어진 굵직한 강력 사건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최고의 형사였던 최 반장은 현재 건강 악화로 투병중이다.
지 경위는 최율식 반장과 말단 순경 선후배로 만나 20년 간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두 사람이 파트너로 활약하며 해결한 사건도 수천 건, 이 가운데는 인두껍을 쓰고 벌였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엽기적인 살인사건도 있었고 정부 고위층이 연루된 민감한 사고도 있었다.
두 달 간의 추적과 밤샘잠복 끝에 진범을 잡은 서울 녹번동 사업가 피살 사건도 그 중 하나다. 강화도 관광개발사업을 벌였던 건설업자 강모(당시 54세)씨가 개인 운전기사에게 살해 돼 하천에 버려진 것. 당시 살인범이었던 운전기사가 태연히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 범행을 은폐하려다 발각, 충격을 줬었다.
“그 때 범인 김모(당시 30세)씨가 피해자 부인과 함께 경찰서에 직접 찾아왔었지요. 눈물을 쏟아가며 ‘우리 사장님 좀 찾아달라’고 실종신고를 냈는데 최 반장님이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주시더군요.”
사라진 강씨는 유독 원한관계에 얽힌 사람이 많았다. 주변인 모두가 용의자라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최 반장은 운전기사 김씨를 주목했다. 이후 2개월 동안 ‘투캅스’와 살인범 사이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강씨가 실종된 지 한 달 보름 만에 피해자 수중에 있던 수표가 사용된 흔적이 나왔습니다. 추적결과 관내의 무직자가 쓴 거더군요. 바로 김씨의 죽마고우이자 공범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개고생’을 한 파트너와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고 지 경위는 토로했다. 몇 달 씩 잠복과 철야가 반복되는 건 일상이었다. 하물며 용의자의 친척이었던 군 고위급 인사가 두 사람을 향해 권총을 들이대는 ‘사건’도 있었다.
“계엄령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습니다. 거물급 장물아비 2명을 추적 중이었는데 한 놈은 잡고, 한 놈은 놓쳤어요. 그런데 먼저 잡힌 녀석의 친척 중 계엄사 대위가 있었습니다. ‘왜 우리 식구만 붙잡아 갔느냐’며 한 밤중에 경찰서 사무실로 쳐들어왔더군요. 덩치가 산만한 사병들까지 죄다 끌고 말이죠. 그때 사건을 담당했던 최 반장님과 저를 향해 권총까지 들이대는 통에 한 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다행히 오해가 풀려 상대방의 사과를 받는 수준에서 일단락됐지만 뒷맛은 씁쓸했다고 지 경위는 토로했다. 봉변에 분노가 치민 그를 토닥이며 달랜 것이 바로 파트너이자 선배인 최율식 반장이었다.
“온 몸이 부서져라 고생하고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강력계 형사라고, 그게 경찰의 애환이자 삶이라고 하시더군요. 사건 앞에서는 냉철한 형사였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선배셨지요. 그분 덕에 정년 마지막 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04년 서대문경찰서 부청문감사관직을 끝으로 은퇴한 지 경위는 스스로 “큰 사건은 경험하지 못했다”며 몸을 낮췄다. 그러나 한 가지 자부심은 있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 27년 간 한 자리를 지킨 지승택 경위의 뚝심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리얼스토리 talk box 지승택 경위
“출소 뒤 칼 들이댔던 전과자, 목사님 돼 만나”
은퇴한 지 6년, 지승택 경위의 관심사는 여전히 도둑잡기와 수사다. 4년 전 에스원 서울 은평지구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왕년의 ‘괴도 사냥꾼’ 경력을 살려 또 다시 도둑 잡는 회사에 입사한 셈이다. 30년 간 도둑을 쫓으며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 힘들고 고된 일이 분명함에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 은퇴 뒤에도 관할 지역은 그대로다.
▲현역 시절 27년 동안 한 곳에서 근무하다보니 관내 범죄꾼들 중에 ‘지 형사’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은평구 내 치안은 거의 내 주특기가 되다시피 했다. 아마 지금 회사도 그때의 경험을 높이 사주는 듯 하다. 내가 자리를 지킨 이후 관할 내에서 절도 사건은 상당히 많이 줄었다.
- 범죄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만큼 그들로부터 위협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정말 죽을 뻔한 적이 두 번 정도 있었다. 관내에 전문 절도범을 구속시켰는데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원한을 산 것 같다. 출소 뒤 찾아왔더라. ‘차 한 잔 하자’는 말에 의심 없이 따라갔는데 다방에 앉자마자 시퍼런 사시미 칼을 들이밀며 ‘용돈’을 달라고 위협했다. 일반인도 많은 곳에서 칼부림을 할 수 없어 적당히 달래 자리를 피했다. 이후 그 녀석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예의주시했고, 나한테만 4번이나 붙잡혀 경찰서 내에서는 우리를 ‘악연’으로 불렀다. 얼마 전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됐다는 얘길 들었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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