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사반장 24탄 ‘형사 매뉴얼’ 신현덕 경감
대한민국 수사반장 24탄 ‘형사 매뉴얼’ 신현덕 경감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12-22 10:36
  • 승인 2009.12.22 10:36
  • 호수 817
  • 1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연재 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사촌누나 살해한 패륜아 피해자가 잡아줬다”
신현덕 경감(위) · 신 경감이 공개한 당시 사건 기록

경찰 경력 37년 7개월. 그 중 수사부서에서만 26년의 세월을 보냈다. 19년 동안 8만6000여명의 경찰 후배들을 제자로 받았고 이들에게 2300시간 이상 수사기법을 가르쳤다. 직접 써낸 수사관련 전문 서적도 17권에 달하는 그는 살아 있는 ‘형사 매뉴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연구관실 터줏대감 신현덕(69)경감의 이야기다.

1952년 충북경찰국 순경으로 입문한 신 경감은 화랑무공훈장을 비롯해 48회에 걸쳐 크고 작은 표창을 받을 만큼 성실함과 능력을 고루 갖췄다는 평을 얻었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매일 아침 서울지방청 광역수사대 사무실에 출근해 수사관 말년의 의욕을 불태우는 그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건 가운데서도 신 경감은 유독 27년 전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의 기록을 기자에게 꺼내 보였다. “죽은 피해자가 잡아 준 범인”이라며 아리송한 한 마디를 던진 그가 경험한 기막힌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82년 6월 2일. 잔인한 비극이 서울 서대문구의 한 가정집을 덮쳤다. 피해자는 모두 4명. 가정주부 이모(당시 40세)여인과 이 여인의 9살 난 둘째, 2살짜리 막내는 이미 숨이 끊어졌고 중학교 1학년인 장남은 머리와 목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됐다.

“집안에 들어섰는데 거실부터 시작해 온 집안이 피투성이였습니다. 범인은 피해자들이 머물고 있는 방을 샅샅이 뒤져가며 그들을 학살한 셈이었지요.”


등산용 손도끼로 10차례 가격

당시 서울시경 형사과 소속이었던 신현덕 경감은 27년이 지났음에도 현장의 참혹함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거실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핏자국을 따라 현관 옆 피아노 방에서 발견된 이 여인은 얼굴과 온 몸을 난자당해 어떤 흉기로 당했는지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여인의 정수리와 뒤통수는 끝이 날카로운 묵직한 흉기로 짓이겨져 있었고 특히 이마 한 가운데는 좁은 칼날이 깊숙이 박혀 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또 여인의 목과 상체에는 머리를 가격한 것과 같은 흉기로 내리친 흔적이 10여 군데 이상 발견됐다. 범인은 어떻게든 이 여인의 목숨을 빼앗을 작정인 듯 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린 아이들까지 잔혹하게 살해됐다는 겁니다. 이제 막 말문이 트였을까 싶은 2살 꼬마는 목이 졸렸고 9살짜리 남자 아이는 제 엄마처럼 이마와 머리가 완전히 부서져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했지만 특별히 집안을 뒤진 흔적은 없었다. 뒤늦게 비보를 듣고 달려온 이 여인의 남편을 통해 확인한 결과 없어진 것은 당시 시가 18만원 상당의 카메라와 이 여인의 손목시계 정도가 다였다. 특별히 금품을 노린 강도의 소행 같지는 않았다. 현장을 둘러 본 신 경감과 시경 형사들은 범인의 윤곽을 찾아낼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사건 현장을 여럿 경험하다보면 기본적인 공식 같은 게 있습니다. 제법 부유한 축에 속했던 피해자의 집이 서랍 몇 개가 열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 비교적 잘 정돈돼 있었지요. 이건 강도로 위장하기 위한 소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이 여인의 몸에 반항한 흔적이 없었지요. 더구나 각기 다른 방에 있던 아이들까지 찾아다니며 살해한 것으로 봤을 때 적어도 2명 이상의 범인이 피해자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얘깁니다.”

감식반 조사결과 피해자들을 무참히 살해한 흉기는 등산용 손도끼로 밝혀졌다. 범인은 피해자 가운데도 특히 이 여인을 향해 10여 차례 이상 도끼를 휘둘러 시신을 훼손했다. 그녀에게 특히 원한이 깊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곧바로 탐문수사가 시작됐다. 관할서인 서대문경찰서 형사들과 의기투합해 탐문조를 편성한 신 경감은 이 여인의 집을 중심으로 팔방에 수사관을 배치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남이 범행 상황을 증언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치명상을 입고 중태에 빠진 소년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튿날 유력한 용의자에 대한 제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 이웃에 15살 먹은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사건 며칠 전 수상한 남자를 봤다는 겁니다.”

살해된 꼬마들을 유독 귀여워했던 김모(당시 15세)양. 자주 이 여인의 집에 놀러가 아이들의 보모 노릇을 하곤 했던 김양은 사건이 벌어지기 닷새 전 험악한 광경을 보았노라고 형사들에게 말했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 여인을 찾아와 “돈을 꿔 달라”고 졸랐고 이 여인이 이를 거절하자 욕설을 퍼부으며 괴롭혔다는 것.


양 발목 짓누르고 확인사살

김양은 또 그가 이 여인을 “누나”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누나. 특별히 내연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주변인 중 피해자를 ‘누나’라 부를 만한 인물은 몇 없었다. 유력한 용의자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피해자 주변을 탐문하던 중 폭력 전과가 있는 사촌남동생이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충북 청주에 본가가 있지만 자주 사촌누나를 찾아왔었다는 피해자 남편의 진술도 나와 곧장 녀석을 추적하기 시작했지요.”

신 경감은 직속 후배 한 명만을 데리고 조용히 청주로 향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꼽힌 건 이 여인의 사촌동생 김모(당시 23세)씨. 폭력과 특수절도 2범으로 1년 정도 형무소를 전전한 기록이 있었다. 그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수사를 시작하자 김씨가 교도소 동기인 정모(당시 28세)씨와 한동안 어울리다 최근 함께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 공모해 이 여인 가족을 몰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점점 굳어졌다.

“청주에서 현지 조사를 벌이던 중 정씨가 인근 운전면허시험장에 다닌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곧장 해당 면허시험장으로 가 잠복근무를 했지요.”

일반인을 가장한 신 경감과 후배 형사는 운전면허 수험서를 사들고 시험장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길 3시간 여. 정씨가 연습 중인 트럭을 통째로 접수한 신 경감 일행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기 전 형사들의 숙소로 끌고 가 심문을 벌였다.

“처음엔 절대 아니라고 부득부득 우기더군요. 설마 범행 이틀 만에 경찰이 턱 밑까지 쫓아왔을 거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마침 결정적인 증거가 전화로 날아들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증언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이 여인의 장남이 겨우 의식을 회복해 범인의 정체를 소상히 형사들에게 털어놓았던 것. 친척 김씨와 낯선 남자가 어머니와 동생을 잔혹하게 도륙했다는 사실을 유일한 생존자였던 소년이 밝혀낸 것이다.

확정증거나 다름없는 피해자 진술이 나오자 정씨의 모르쇠도 무색해졌다. 결국 공범이자 주범인 김씨의 행방을 있는 그대로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범행 직후 카메라와 손목시계를 각각 나눠 가진 범인들은 그 길로 헤어졌답니다. 이후 김씨는 죽마고우를 만나러 경기도 양평의 군부대로 면회를 갔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수사팀을 급파해 김씨의 행방을 찾기 전에 김씨는 이미 친구의 소속 부대에 억류된 상태였다. 끔찍한 죄를 털어놓은 김씨를 당시 공군 병장이었던 친구 박모씨가 윗선에 보고해 임시로 체포했던 것이다. 이 여인 가족이 살해된 지 꼭 사흘 만이었다.

“나중에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범행 과정은 더 끔찍했습니다. 이미 도끼로 여러 번 내리 찍은 이 여인을 확인사살하기 위해 김씨는 사촌누이의 몸을 붙잡아 고정시키고 정씨에게 칼로 이마를 찌르라 시켰더군요. 뿐만 아니라 막내를 목 졸라 죽인 뒤 낮잠을 자던 9살짜리 꼬마가 뒤척이자 양 발목을 붙잡아 결박한 상태에서 도끼질을 했답니다. 그나마 중학생 장남이 목숨을 부지한 건 천운이었지요. 녀석들은 처음부터 목격자까지 모두 없앨 작정이었으니 말입니다.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동기요? 돈이었습니다. 부유한 사촌누나가 사업자금을 안 대주는 게 분해 교도소 동기를 끌어들여 살인을 저지른 거지요. 결국 손에 쥔 건 낡은 카메라와 시계 하나가 전부였는데 말입니다.”


억울한 한(恨)이 형사 움직인다

피해자가 잡아준 범인. 신 경감은 중상을 입은 이 여인의 장남이 범인을 잡아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부했다. 수사는 경찰이 하지만 피해자의 절박함이 형사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얘기다.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원년 멤버를 거쳐 서울 마포경찰서 강력계, 서울시경 형사과 등 수사 부서를 두루 거친 신 경감은 유독 원칙을 강조하는 인물로 통한다. ‘정의의 사나이’가 신 경감이 생각하는 형사로서의 이상향이다.

“무조건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억울하게 죽고, 억울하게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의 한이 형사들을 움직이지요.”

거물급 도박꾼을 잡기 위해 담을 넘었다 송아지만한 도사견에 물려 허벅지 살이 뭉텅 떨어져 나간 적도, 추격 도중 사고로 숨진 용의자를 문상 갔다 그 부인에게 멱살잡이와 폭언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시련은 예사로 넘길 만큼 무던해야 수사경찰(형사)이 된다는 게 신 경감의 지론이다. 이런 탓에 신 경감은 강의에 나설 때마다 실무에 앞서 ‘형사의 덕목’을 강조한다.

“승진이나 돈에 연연하던 동료들이 쓸쓸히 제복을 벗는 모습을 수없이 봤습니다. 적어도 내가 가르친 후배들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길 바라는 게 노(老)수사관의 심정입니다.”



#리얼스토리 talk box 신현덕 경감

2100p짜리 수사기법서적 기자에 선물 “형사의 덕목? ‘공정·친절·신속·청렴’”

신현덕 경감은 원로 수사관들 사이에서 일명 ‘신 총무’로 불린다. 매일 아침 9시면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사무실에 출근해 각종 일정을 체크하고 연락책을 전담하는 까닭이다. 특히 매년 집필하는 수사기법서와 법전을 방불케 하는 각종 자료집은 후배 형사들 사이에서도 귀한 자료로 꼽힌다. 모두 현직 시절 누구보다 꼼꼼한 수사관이었던 신 경감의 성격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기자에게 올해 초 펴낸 2100p 분량의 신종범죄 판례집을 선물한 그는 ‘노익장’을 뛰어넘어 여전한 열정을 간직한 청년이다.

- 법학도 출신의 엘리트로 수사경찰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의외다.
▲ 군복무를 충북경찰국에서 하면서 경찰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부유층 자제들을 비롯한 징집기피자를 추적해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전국에서 8명에게만 주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수사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부터다.

- 현역 은퇴 뒤 논문과 서적 집필에 상당기간 매달렸다고 들었다.
▲ 은퇴 직후 서울시경 수사연구관 직함을 받아 1990년부터 올해 초까지 후배 경찰과 군 수사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88년 남성 성범죄자의 심리적 특성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고 수업 교재를 직접 만들면서 어느 정도 욕심이 생겼다.

- 강의는 주로 어떤 내용인지.
▲ 교육을 받는 대상에 따라 다르다. 주로 수사직무교육원과 수사연수소, 경찰종합학교 등 경찰 교육기관과 군 합수부, 소방학교 등 각 기관 수사관들을 상대로 수사기법 등 실무를 가르쳤다. 하지만 후배 경찰들에겐 그 전에 기본적인 마음가짐부터 새기게 했다. ‘수사경찰의 4가지 덕목’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지금 후배 형사들도 반드시 익혀야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 4가지 덕목은 어떤 것인가.
▲ 공정과 친절, 신속과 청렴 등 네 가지다. 형사는 언제나 신뢰감이 넘쳐야 하며 누구나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도록 엄격한 법적용을 해야 한다. 또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마음으로 신속한 일처리를 통해 민원인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절대 금전적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무실 밖에서 사건과 관련된 인사를 만나는 것도 금물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불명예스럽게 제복을 벗는 경찰들은 이 네 가지 원칙을 무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수영 기자]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