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병 여부 ‘안 묻고 안 털어놓는’ 직장 문화 바꿔야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고용주는 종업원의 정신 건강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가? 종업원 사생활 존중을 위해 고용주가 종업원의 정신병력(病歷)을 따지지 않는 현재의 인사 관행은 적절한가?
지난달 24일 프랑스 쪽 알프스에 일부러 추락해 150명이 사망한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 소속 저가 항공 저먼윙스 여객기 사고를 계기로 비단 항공업계뿐만 아니라 여타 산업계에서도 이런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사고기는 기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부기장 안드레아스 루비츠(28)가 고의로 추락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루비츠는 오랫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고, 회사에 그 사실을 숨겨왔으며, 사고 당일에도 병가용(病暇用) 의사 진단서를 찢어버리고 비행에 나섰다. 루비츠가 조종사가 되기 몇 년 전 자살 충동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실도 독일 검찰에 의해 추가로 확인됐다.
병력 안 따지는 인사 관행
루비츠의 정신 이상 가능성은 사전에 전혀 파악되지 못했다. 루비츠는 2013년 입사 당시 정신 감정을 통과했으나, 이후 주기적으로 정신 상태 검사를 받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루프트한자가 항공기 안전점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조종사 정신 점검에는 무력했음이 증명됐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조종사가 고의로 여객기를 추락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12월 싱가포르 항공사 실크에어의 보잉737기는 순항 중 갑자기 급강하하며 늪지대로 추락해 탑승자 104명이 모두 숨졌다. 당시 사고기 기장은 거액 도박 빚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저먼윙스 추락 사건으로 세계 항공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영국 저가항공사 이지젯은 당장 지난달 27일부터 운항 시간 내내 조종실에 두 명의 승무원이 함께 있도록 했다. 중동 최대 항공사인 에미레이트항공과 캐나다 국적 항공사인 에어캐나다, 영국 전세 항공사인 모나크항공, 노르웨이 저가항공사인 노르웨이 에어셔틀 등도 '조종실 2인' 규정을 두겠다고 밝혔다. 미국 항공사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조종사 2명 중 1명이 조종실을 벗어나면 다른 승무원이 대신 조종실에 들어가게 해 조종실에서 항상 2명이 자리를 지키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사고가 난 저먼윙스를 비롯해 상당수 항공사에는 이런 규정이 없다.
저먼윙스 사고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 비행기 조종간을 잡거나 원자력 발전소에서 중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 즉 작업장에서의 정신 질환자 통제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고용주가 근로자의 사생활을 존중하되 정신 질환이 있는 근로자가 일터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정신 건강 문제는 세계적인 골칫거리다. 세계보건기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유럽 성인 가운데
27%인 8300만 명이 우울증, 약물남용, 불안 증세를 보였다.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나를 평소 차별대우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다면 고용주와 종업원이 직장 내 정신건강에 대해 활발히 논의해 정신 질환으로 인한 사고 위험을 줄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문제다. 직장 내 간부 직원은 부하 직원의 우울증에 대해 굳이 알려고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알았다가는 훗날 해당 직원에게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나를 당신이 평소 차별대우했다”며 소송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가 알려지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심지어 해고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사실을 한사코 숨긴다. 그러다 보니 개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 제대로 치유될 기회가 줄어든다.
미국의 경우, 장애인법(ADA)에 따라 고용주는 입사 지원자에게 정신건강을 포함한 의료상태에 관해 질문하지 못한다. 일단 채용공고를 내면 고용주는 입사 지원자가 채용 예정 직위에 필요한 자격요건을 갖췄는지만 살펴야 한다. 이 자격요건에는 신체적, 인지적, 감성적 능력만 포함될 뿐 정신이 멀쩡해야 한다는 요건은 없다.
물론 중요도가 특히 높은 직종에 대해 고용주는 입사 지원자에게 추가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 예컨대 의사, 비행기 조종사, 통학버스 운전사, 전력회사 직원 등이 취업하려면 관련 업종에서 요구하는 직무기준 또는 면허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통학버스 운전사의 경우 어린이들을 태우고 다니기 때문에 단지 운전만 잘해서는 부족하며 어린이 안전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직업윤리와 직무 수행 수준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고용주가 운전사 지원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는 불가능하다.
정신과 치료 받도록 유도
정신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경찰, 군인, 비행기 조종사 등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위험한 존재다. 그런데 이들 직종 종사자는 하나같이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직장 문화 속에서 근무하며 따라서 자신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어도 남들에게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조직 내에서 따돌림당할까봐 문제를 속으로만 삭이기 일쑤다.
이런 현상에 주목해 미국 연방항공국(FAA)은 정신병 약을 복용 중인 조종사는 일절 조종간을 잡지 못하게 했던 금지 규정을 약간 완화해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조종사는 비행기를 몰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조처는 조종사가 정신과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도록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이번 저먼윙스 사고를 계기로 정신질환이 있는 조종사는 비행기를 몰 수 없다는 기존 규정을 더 강화한다면 조종사들이 자신의 정신병 증상을 더 꽁꽁 숨길 것으로 우려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법 전문가들은 치료받지 않은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식하는 고용주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종업원의 정신 질환과 관련해 ‘묻지도 털어놓지도 않는’ 작업장 문화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송, 건설, 상수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에 종사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게 되면 그로 인한 피해가 엄청난 만큼 특히 이 분야 고용주들은 적극적으로 직원의 정신 질환 여부를 사전에 점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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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