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사반장 23탄 ‘화려한 추격자’ 김동화 경감
대한민국 수사반장 23탄 ‘화려한 추격자’ 김동화 경감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12-15 11:01
  • 승인 2009.12.15 11:01
  • 호수 816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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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살인향기 풍기던 미모의 미망인 잊을 수 없었다”
영화 의 한장면.

“1년을 쫓아 모은 수많은 정황증거가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미제 파일로 처박히고 말았지요. 내 손을 거쳐 간 사건과 범인들이 수천 건이지만 그일 만큼은 죽는 날까지 못 잊을 겁니다.”

상당수 수사관들이 ‘사건 해결 100%’를 훈장처럼 자랑한다. 특히 형사에게 있어 ‘미제사건’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감추고 싶은 치부다. 그러나 김동화 경감은 35년 경찰 생활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끝내 해결하지 못한 살인극을 가장 인상적인 사건으로 꼽았다.

치안본부 특수대와 서울 서초경찰서, 강남경찰서 형사계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베테랑 수사관으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1990년대 초, 계절이 4번 바뀌는 동안 그를 괴롭힌 ‘살인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91년 초여름. 한강 상류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강태공은 묵직한 손맛에 크게 반색했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낚싯줄의 모양만 봐도 대어가 틀림없었다. 어찌나 큰 놈인지 낚싯대를 들고 버티는 것도 힘에 부칠 무렵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대어를 건진 낚시꾼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여행가방 속 웅크린 남자

물에 푹 젖은 검은색 대형 가방이 낚싯바늘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수면위로 떠오른 것. 뭍으로 건져낸 가방에서는 여름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냉기가 피어올랐다. 물비린내와는 다른 섬뜩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끼며 낚시꾼은 조심스럽게 가방 지퍼를 열었다.

“으악!!!”

가방 지퍼를 2/3쯤 열었을 뿐이었지만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진 낚시꾼 앞에, 퉁퉁 불어 살이 부스러지기 시작한 사람의 얼굴이 삐죽이 흉물을 드러냈다.

“날이 더운데다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었던 듯, 시신 상태가 흉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손발이 모두 뭉그러져 지문확인 조차 어려웠지요.”

당시 서초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동화 경감에게 가방 속 웅크린 남자와의 첫 만남은 꺼림칙함으로 기억된다. 사인은 교살(목 졸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신원 확인결과 남자는 50대 초반의 L씨로 밝혀졌다. 그는 서울 강남에서 소문난 유명 세무사였다.

수사 경험이 풍부한 서초서 형사들로서는 어려운 사건이 아닐 수도 있었다. 유명세와 재력을 갖춘 피해자가 변을 당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관적인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절망으로 바뀌었다.

“죽을 이유가 너무 많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요. 돈과 여자, 사업상 라이벌까지 걸리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L씨 주위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마지막엔 모든 단서가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바로 L씨의 미망인이었지요.”


“L씨, 본처와 밥 먹고 잠자리는 정부와”

김 경감이 파악한 피해자의 사생활은 충격적이었다. 잘 나가는 세무사로 당시 10억원대 재산가였던 L씨는 두 명의 부인과 여러 명의 내연녀를 오가며 ‘황제 생활’을 즐겼다고 김 경감은 회상했다. 대학생 딸을 둔 본처 K여인과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 L씨는 퇴근 후 본처 집에서 식사를 한 뒤 잠자리는 두 번째 부인과 나눴다.

“요즘 한창 난리인 ‘막장 드라마’ 같은 사연이었지요. 두 부인 사이에서 모두 자식을 낳고 공개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둘째 부인은 아예 L씨의 부모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모습을 감춘 시점은 본부인이 차려준 저녁을 먹고 둘째 부인이 있는 집으로 향하던 시각과 일치했다. 누군가 본처 집에서 나온 L씨를 납치해 살해하고 시신을 강에 던졌다는 뜻이었다. 범인은 피해자의 가정사와 이동경로를 잘 아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같은 속사정을 파악한 김 경감은 K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남편과 시부모의 정까지 빼앗긴 그녀의 상실감을 가장 확실한 살인동기로 꼽은 탓이다.

“일단 K여인은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건장한 남성인 피해자를 여자 혼자 목 졸라 살해하고 가방에 담아 강물에 던지는 일은 쉽지 않지요. 공범이 있거나 제3자를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김 경감은 먼저 강력계 5개 팀을 모두 소집해 서울 강남 인근에서 활동하는 조직폭력배와 관련 전과자들을 들쑤셨다. 관내에서 제법 큰 사건인 탓에 누군가 사주를 받았다면 업계에 소문이 흘러들었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동시에 K여인은 물론 다른 내연녀들을 포함해 L씨 주변 인물들 계좌에서 뭉칫돈이 오간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시신에 반항한 흔적은커녕 외상조차 없었기에 이를 업으로 삼는 전문가 소행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기자에게 일련의 수사 과정을 되짚어주던 김 경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 것은 이 대목에서였다. ‘참담한 결과였다’며 쓴 입맛을 다신 김 경감은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깨끗했습니다. 서초서 강력계 5개 팀에 다른 부서 요원들까지 총동원해 저인망식 수사를 했는데 동기 외에는 명확한 직접증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겁니다. 매일 아침 수사 상황 보고를 받으며 참담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K여인과 마지막 담판

어느 덧 해가 바뀌고 L씨 사건 수사는 1년여의 장기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김 경감은 물론 일선 형사들까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범인의 정체가 오리무중에 빠진 가운데 김 경감은 마지막 담판을 결심했다. 때마침 K여인이 서울 모 백화점에서 고가의 물건을 훔치다 발각되는 ‘운’도 따랐다.

“일단 절도 혐의로 K여인을 잡아들였지만 조사실에서는 L씨 피살사건에 더 공을 들였지요. 서류철로 5권 분량이 넘는 증거자료를 일일이 들이밀며 자백을 유도했지만…”

김 경감은 잠시 동안 입을 꾹 다문 채 뜸을 들였다. 당시의 난감함을 곱씹는 듯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단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의 여자들에 대해 불같은 적개심을 드러내면서도 사건에 관련해서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형사들의 말을 받아치더군요.”

김 경감은 K여인을 ‘미모의 미망인’으로 기억했다. 과년한 딸을 뒀지만 얼굴도 몸매도 평균 이상이었다는 것.

“사실 처음에 K여인과 L씨의 여자들을 만났을 때 놀랐습니다. 외모만 보면 본처인 K여인이 가장 뛰어났으니 말입니다. 본부인만한 첩이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구나 싶었지요.”

이런 점 때문인지 K여인은 남편의 내연녀들을 향해 비정상적인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 습관적인 도벽도 배우자에게 버림받은 절망감을 보상받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는 게 김 경감의 생각이다.

“결국 K여인은 혐의가 확인된 절도에 대해서만 죗값을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L씨 피살사건은 결국 진범을 못 잡고 미제사건이 됐지요.”

63년 인청시경 형사로 입문한 뒤 35년 간 수천 명의 범인을 검거했지만 김 경감의 뇌리를 사로잡은 건 영구미제로 잊혀진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지난 1991년 이형호 군 유괴살인사건에 대한 감회도 남다르다.


“기사 읽고 있을 ‘그놈 목소리’ 범인”

이형호 군 유괴살인사건은 2000년대 영화 ‘그놈 목소리’로 재연되며 화성 연쇄살인사건(경기남부 살인사건),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등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된 바 있다. 김 경감은 사건 당시 기존 수사팀이 물갈이된 이후 강남경찰서 형사계장으로 부임해 후속 수사를 지휘했었다.

“사실 내가 부임했을 땐 이미 수사가 종결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숨진 어린이의 시신은 물론 현장 증거가 모조리 없어진 상황에서 수십 권에 달하는 기록을 밤새 읽으며 범인의 윤곽이라도 잡아보려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형사반장이었던 후배 이양구 경감(본지 804호 보도)은 아예 수사기록을 통째로 달달 외울 만큼 열성적이었지요. 그런데 이런 노력도 다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김 경감은 다 잡은 범인을 경찰이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며 자책했다. 이군을 유괴한 용의자는 두 번에 걸쳐 몸값을 요구했고 이군 부모와 접촉했지만 경찰의 맹추격을 따돌리며 영원히 종적을 감췄다. 김 경감은 “경찰이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경찰이 접선장소 바로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 범인이 눈치를 못 채겠습니까? 더구나 도심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는데 그 흔한 오토바이 하나 대기시키지 않았다는 건 판단 착오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때 놓친 범인은 어디선가 이 기사를 읽고 있겠지요.”

이렇듯 화려한 전성기보다 회한을 가슴에 새긴 김동화 경감. 그는 후배들을 향해 덕담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대한민국 경찰로서 진심을 다해 몸 바쳐 일하고 있는가?”


#리얼스토리 talk box 김동화 경감

식칼 들고 덤비던 전과자, 목 놓아 통곡한 이유
경찰이 소매치기 월급 줘가며 고용한 속사정


35년 간 수많은 강력사건을 취급했지만 김동화 수사관의 전성기는 서울시경 치기전담반(소매치기 검거 전담부서) 시절이다. 치안본부 특수대에서 81년 서울시경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도범계 치기전담반 창설멤버로 뛰어난 검거실적을 자랑했다. 3년 동안 1300여명의 소매치기 사범을 잡아들인 그는 원한을 품은 전과자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 등 형사로서의 애환을 고스란히 경험했다고 토로했다. 화려한 시절, 김동화 경감과 서울시경 치기전담반의 일화는 깨알 같은 재미가 숨어있었다.

- 소매치기는 현행범이 아니면 잡기가 힘든데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나.
▲ “치기반의 생명은 인맥이다. 당시 형사들은 소매치기 조직의 관리자격인 속칭 ‘야당’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해 업계 거물들의 소재와 수법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야당들은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자신들이 관리하는 구역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나중에는 아예 경찰이 야당들에게 ‘월급’을 주고 고용하다시피 했다.”

- 당시 치기전담반에서 가장 뛰어난 멤버들을 꼽아본다면.
▲ “치기반 자체가 경찰 정예부대나 다름없지만 나를 포함해 후배인 이양구, 정인성 형사 등 세 명이 늘 톱을 달렸다. 특히 정 형사는 타고난 범죄사냥꾼이었다. 그가 한번 뜨면 증거물로 압수한 장물들이 산처럼 쌓여 트럭을 대절해 옮겨야할 정도였다. 안타까운 것은 개인 신상 문제로 쫓기듯 경찰을 떠났다는 것. 정말 유능한 형사였는데 현재는 동료들과도 연락을 끊고 은둔생활을 하는 모양이다. 직속상관이자 선배로서 가슴이 먹먹하다.”

- 서울 시내 소매치기들을 싹쓸이했으니 원한도 상당히 샀을 것 같다.
▲ “대부분의 강력계 형사들처럼 나도 살해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새벽녘에 퇴근을 했는데 집 근처 골목에서 한 사내가 시퍼런 식칼을 들고 달려드는 게 아닌가. 꼼짝없이 칼을 맞겠구나 싶었는데 괴한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그대로 칼을 떨어트리며 대성통곡을 하더라. 감옥에 보낸 내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막상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을 하니 겁이 나더란다. 딱한 마음에 같이 주저앉아 하소연을 들어주고 잘 다독여 돌려보냈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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