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 유영철 버티고, ‘싹싹한’ 정남규 갔다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살인범 정남규(40)가 지난 21일 자살을 기도해 이튿날 새벽 숨졌다. 지난 2007년 4월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31개월여 만이다 과거 법정에서 “지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죽는 것은 두렵다”고 말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혔던 정남규. 그가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극심한 고독감과 두려움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본지 취재결과 확인됐다. 정과 최근까지 서신을 주고받은 모 인사에 따르면 그는 이 편지에서 괴로운 속내를 일부 털어놓았다.
정남규가 남긴 자필 메모와 옥중서신에는 이른바 ‘자살 징후’로 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러 차례 눈에 띈다. 살인은 즐겼지만 죽는 것은 두렵다던 연쇄살인범. 그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기까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궁금증을 따라가봤다.
부천에서 두 명의 초등학생을 목 졸라 죽이는 등 정남규는 모두 13명의 생명을 빼앗은 냉혈 살인마였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서울구치소에 나란히 수감됐지만 두 사람이 제대로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생활 태도 역시 정반대였다.
“바깥세상 동경, 그리움 컸다”
유영철이 외부는 물론 동료 재소자와도 담을 쌓고 지낼 때 정남규는 상당히 구치소 생활에 잘 적응했다.
유영철은 매일 아침 다수의 일간지를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 상당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정은 독서보다는 자필로 짤막한 메모나 일기를 적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다른 재소자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다.
정이 숨지기 전 서울구치소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남규는)성품 자체가 붙임성이 좋다. 다른 재소자들과도 쉽게 어울리며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었다.
정남규는 2년여 전 모 주간지 기자와 면담에서 참회의 눈물까지 흘렸었다. 그는 자살을 기도하기 얼마 전인 최근까지 몇몇 인사와 옥중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신적인 위안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 관계자는 “정씨가 극심한 외로움이 시달리고 있었다”며 “다른 재소자들과는 다소 대화를 나누며 소통을 했지만 가족이나 친구 등의 면회가 전혀 없어 바깥세상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이 주변 사람들에게 ‘외롭다’ ‘고독하다’는 속내를 자주 드러냈다”며 “오랜 고독감에 사형집행에 대한 두려움이 겹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 있다”고 풀이했다.
과거 정남규는 살인을 위해 체력을 단련하고 범죄심리학 관련 서적을 독파하며 ‘완전범죄’에 중독돼 있었다. 특히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의 뻔뻔함은 ‘정남규 어록’이 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법정에서 “지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죽는 것은 두렵다”고 말해 보는 이를 경악케 한 게 대표적이다. 정은 현장검증과정에서 유족들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치료감호 이유는 우울증?
정남규의 자살기도 과정은 상당히 치밀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정남규는 서울구치소에 있는 6.76㎡(약 2.05평) 넓이의 독거실에 수감돼 있었다.
그는 지난 21일 아침 6시 35분쯤 독방 안에 있는 1.05m 가량 높이의 TV 받침대 모서리에 비닐봉투를 찢어 꼬아 만든 끈을 걸고 여기에 목을 맸다. 순찰 중이던 교도관이 그를 발견해 인근 병원에서 응급처치가 이뤄졌지만 뇌손상과 심장쇼크로 이튿날인 지난 22일 새벽 2시 35분 사망판정을 받았다고 법무부는 밝혔다.
관련 법령에 따라 정신상태가 불안한 재소자의 경우 CCTV가 설치된 독방에 배정되지만 정은 지난해 8월 CCTV가 없는 지금의 방으로 옮겼다. 사형수 등 재소자들에 대한 관리에 구멍이 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은 과거 국립법무병원에서 머문 전력이 있다. 국립법무병원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피의자의 정신감정과 치료감호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전문가들은 정이 우울증 등을 앓았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정남규가 치료감호를 받은 경력이 있다”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평생 독방에서 혼자 지내야 하는 고립감에 우울증이 심해졌을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정이 극심한 고독감과 두려움에 시달렸다는 정황은 여러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지난 4월 기독교 세례를 받은 그는 매달 2~3차례 목사와 상담을 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는 게 구치소 관계자의 말이다.
또 법무부에 따르면 그의 노트에는 “현재 사형을 폐지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요즘 사형제도 문제가 다시…,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이라는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에 정이 최근 ‘조두순 사건’ 등 흉악범죄가 잇따르며 사형 집행을 옹호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막연한 불안감에 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쓰레기봉투에서 속옷까지… 감옥 안 자살수법 백태
정남규가 자살 도구로 쓴 것은 구치소에서 나눠준 폭 58㎝, 길이 75㎝ 크기의 재활용 쓰레기 수거봉지였다. 정은 이 봉지를 잘게 찢어 새끼줄처럼 꼬아 약 1m길이의 끈을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2004년 이후 5년 동안 자살로 목숨을 잃은 재소자는 정남규 등 사형수를 포함해 모두 82명, 해마다 약 15명 이상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선호하는’ 자살 방법은 목을 매는 것으로 자살한 재소자 가운데 97.2%에 달하는 70명이 속옷이나 수건 등을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004년 부산구치소에서 자살한 안상영 전 부산시장은 러닝셔츠를 찢어 만든 끈으로 선풍기 걸이에 목을 맸으며 지난 2007년 2월에는 천안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김모씨가 침낭줄로 목을 매 숨졌다. 이밖에 모서리를 날카롭게 벼린 숟가락이나 사용하던 안경을 깨뜨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구치소(27명)보다 교도소(45명)에서 자살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시간대별로는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가 25명(34.7%), 요일별로는 휴일인 일요일이 17명(23.6%)으로 가장 많았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