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세상을 상대로 치기 어린 주먹을 휘두르던
청년 장총찬은 어느새 지혜롭고 신중한 노년의 전직 국회의원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한국 최초 밀리언셀러 <인간시장>을 탄생시킨 작가, 8년 연속 의정활동 평가에서 1위를 받은 전 국회의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 방송인이자 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이쯤 하면 익숙하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작가 김홍신(68)이다.
그가 세상에 얼굴을 내민지 3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인간시장"의 열혈청년 장총찬은 나이를 먹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군부 독재시절 사회부조리를 고발하던 주인공처럼 험하고 굴곡 많은 인생 속에서도 김홍신은 여전히 "사회정의"를 놓지 않았다. 15~16대 국회의원 재임 중엔 불합리한 법을 바로잡으며 평가 1위를 고수했고, 2004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하면서도 공정한 선거의 선례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역시 최고의 작가였다.
31년째 살고 있다는 서초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원고를 쓰는 2층 서재는 네 벽이 모두 책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도합 만 권이 넘는다는 책이 책꽂이도 모자라 구석진 곳, 책상 위까지 쌓여 있었다. 지하실에 물이 들어차 만 여권의 책을 거의 처분하고 남은 책이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이제까지 써온 책이 150여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규모는 아니다.
- 밀리언셀러 "인간시장"의 장총찬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개혁하는 인물인데, 본인이 원래 그런 데 관심이 있었나요.
“인간시장”은 1981년 출간 당시 초판만 12만권을 찍었고, 1984년엔 100만권이 팔렸습니다. 지금까지 560만부 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출판 역사상 처음으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치기어린 협객 장총찬을 등장시켜 정치·경제·교육·의료·법조·언론 등 각계의 기득권자들을 닥치는 대로 응징하고 조롱한 “인간시장”은 당시 엄혹한 세상을 살던 대중들에게 답답한 속을 풀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습니다. 신성일씨에게 예전에 원빈이나 현빈보다 인기 있었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지만 30년 전 “인간시장”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더 대단했어요. 제 책은 독자들이 줄을 서서 사는 게 아니라 서점 총판에서 성남의 인쇄소 앞에 첫 새벽부터 줄을 서서 책을 받아갈 정도였죠. 하도 주문량이 많아 서점에 예약티켓을 주고 순서대로 나눠줬습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윤전기를 돌려 책을 찍었는데 담당자가 ‘방학 책 빼고는 윤전기 돌려 단행본 찍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인간시장”의 내용은 부조리나 정의롭지 못한 것, 민중을 아프게 하는 것, 비인간적 태도,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질서, 나라나 민족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잘못된 구조에 관한, 이런 것들은 저의 소설의 관심사이고 “인간시장”도 이런 내용입니다. “인간시장”은 새로운 출판사에서 10권으로 다시 출간합니다.
- “인간시장”을 쓰게 된 동기는.
1979년 말 계엄 때 잡혀갔거든요. 글을 쓴 게 있었는데 국가체제 비방. 군 모독 까지 걸린 거예요. 한 달여 간 수사를 받고 나왔는데 모 신문사 편집국장이 저를 보자고 해요. 그곳에 문단 선배가 계셨는데 저를 추천하신 거죠. 그래서 신문사에 갔는데 저에게 소설 연재를 하재요. 연재소설은 처음이고 일주일에 200자 원고지 40매씩 써야 해요. 저는 쓰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중간에 도망치듯 나왔어요. 안한다고 하기도 하기에도 자신이 없으니깐 판단이 안서고...그리고 계엄사에서 풀려날 때 절대 정권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게 겁이 난거죠. 그런데 내 성질에 안 쓸 수도 없고... 도망치듯 나왔으니까 문단선배가 전화를 해서 야단을 치는 거예요. 어떻게 말도 없이 그냥 가느냐고. 그래서 나는 못 쓰겠다고 하니까. 안 쓰려면 나와서 얼굴을 보고 안 쓴다고 얘기하고 가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또 갔어요. 갔더니 편집국장이 나를 설득하는 거예요. 당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요. 그래서 “인간시장”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는 계엄 상태였는데 두렵지 않았나요.
각오했습니다. 저의 아이들을 유괴해 죽인다고 협박해서 애 엄마가 심장병이 도져 애를 데리고 피신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가족을 힘들게 한 건 사실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미안합니다. 49살의 아내가 타계했고 (부인은 2004년 총선 선거운동을 할 즈음 고인이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시 그런 탓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포함이 된 것도 있습니다.
- “인간시장2”는 안 쓰시나요.
독자들도 그렇고, 출판사에서도 “신 인간시장”을 써달라고 요구합니다. 저도 정치권과 얽힌 이야기를 풀어 쓰려고 기획안만 노트 3권 분량을 만들었어요. 정치권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고 의정자료집도 8권이나 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쓸 수 있죠. 그런데 못쓰겠더라고요. 나이를 먹다보니 ‘꼭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란 생각이 변하더군요. 부정한 사람도 저와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됐구요. 그땐 제가 옳다고 확신해 의분에 떨던 일도 지나고 보니 제 고집인 경우도 많았어요. 또 남의 가슴을 꼭 아프게 해야 하는가 란 연민의식도 들고…. 대신 다른 장편을 막 탈고 다음 카카오에 “단 한 번의 사랑”아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4월말 42회로 연재 후 단행본으로 나옵니다. 그 후 “신 인간시장”도 서서히 써서 출판할 예정입니다.
- 국회의원 8년 동안 빼놓지 않고 의정 활동의원 1등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별명이 1등 국회의원이었습니다. 8년을 연속해서 1등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헌정 사상 거의 유일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때처럼 지금은 종합평가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해마다 큰 신문들이 달려들어서 하고, 시민단체도 여러 군데서 하고, 기관에서도 했습니다.
- 8년 동안 국회의원을 하고 2004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권력이나 명예를 가졌을 때와 잃었을 때, 간극이 컸을 것 같은데요.
간극이 그렇게 넓지 않았습니다. 나는 (권력을) 누리지 말자고 했습니다. 누리면 또 해야 되니까요. 너무 좋으니까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당명에 무조건 백 몇 십 명이 따라갑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다음에 또 하려고 하는 겁니다. 너무 좋은 자리니까요. 저는 그걸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국회의원 배지 한 번 단 적 없고, 레드카펫 깔린 정문으로 단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습니다. 국민한테 빌려 쓰는데, 주인인 국민이 다니지 못하는 곳을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쫙 열리는 정문이 아니라 쪽문과 회전문으로 다녔습니다. 외국 나갈 때도 VIP통로가 아니라 일반 통로로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무렇게 다녀도 상관없습니다.
- 꼬장꼬장 하다는 소리 듣지 않으세요.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15대 국회의원 시절, 48개월 근무했는데 세비는 49번을 받았습니다. 5월 28일부터 3일간 일한 것을 한 달 치로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장을 개설하지 않고 수령을 거부하면서 사무처장, 의장과 계속 싸웠습니다. 결국 국고 예치금으로 예치해 국고로 넘겼습니다. 그러다 16대 때 관련 법안을 고치게 됐습니다. 당시 의원들로부터 당신은 "인간시장" 써서 돈 많이 벌어서 그러냐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국민세금을 남용하는 것 아닌가요.
- 건국대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교수로 있었던 건국대 문제는 이사장의 횡령, 배임. 세습, 총장의 횡령, 사기 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학교에서 저를 생각할 때 권력에 대항하는 인간, 욕망에 타협하지 않는 주체를 그린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라는 작품이 생각납니다. 용기와 참여로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결단이 필요 합니다. 건국대학교를 생각할 때 한없이 안타깝습니다.
-개각 때마다 장관 후보로 거명되고, 시장 출마 요청도 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지금도 가끔 출마 요청을 받습니다. 한때 그 유혹에 마음이 동할 때가 있어요. 내가 그 자리를 가면 어느 정도는 편안하게 누리며 시쳇말로 품을 잡으며 살 수 있을 텐데. 가. 말어. 가. 말어. 고민할 때가 있어요. 결국은 아니다. 내가 본래하고 싶었던 그 일을 하자. 그것이 결국 글 쓰는 것이고. 제자들을 가르치면 변화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럴 때 행복을 느낍니다.
- 마지막으로 소설을 원고지에 펜으로 쓰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저는 가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더디 가고, 때로 느리고, 때로 멈추는 것도 빨리 가는 것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전자메일보다 때 묻은 편지가, 핸드폰보다 직접 골목길을 돌아 친구 집에 찾아가는 것이 훨씬 따뜻하고 정겹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디지털도 인간다운 따뜻함을 지니기 위해 아날로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디지털만 외치다가 우리 모두는 차가운 기계의 노예가 될지도 모릅니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주고 아날로그는 삶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아직도 저는 소설을 펜으로 씁니다.
김홍신 소설가는 작가로 출발했지만 국회의원, 방송인, 교수를 거쳐 현재는 다시 작가로 살고 있다. 그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빚을 갚으려고 노력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소설을 쓰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빚을 갚으려고 했는데, 또 우리 사회에 빚을 지는 거예요. 인생은 계속 빚을 지는 거죠. 하지만, 빚을 갚으려고 계속 해야 되요. 그래야 자기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이죠."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chanho2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