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주도 AIIB에 영·독·프랑스 이어 한국도 참여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미국과 일본이 각각 주도하는 세계은행(WB)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맞서 중국이 주도해 올해 안에 새로 설립할 예정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주요 7개국(G7) 중 절반 이상이 참여를 선언했다. 우리나라도 요모조모 따진 끝에 국익을 고려해 참여를 결정했다. 이로써 AIIB 출범과 관련하여 세계 개발금융의 주도권을 놓고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이 최근 벌여온 물밑 기 싸움이 중국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G7 가운데 영국이 가장 먼저 AIIB 창립 회원국 참여를 선언했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뒤를 이었다. 이제 G7 가운데 남은 나라는 미국과 일본을 빼면 캐나다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외무장관회담에서 한국의 동참을 요청했고 우리 정부는 장고(長考) 끝에 창립 회원국에 합류했다.
창립 회원국 35개국 넘어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AIIB 임시사무국의 진리췬 사무국장은 3월 22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고위포럼에서 “3월 말까지 신청을 받는 AIIB의 창립 회원국이 35개국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 국장은 “최근 영국이 서방국 가운데 처음 가입을 선언한 이후 독일·프랑스·이탈리아·룩셈부르크·스위스 등이 신청서를 냈다"며 “AIIB는 문호를 열어놓고 있으며 북미와 유럽, 다른 국제금융 기구들이 합작하겠다면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 국장은 ADB 통계를 인용해 “2010~2020년 아시아·태평양 지역 인프라 개선을 위해 약 8조 달러(8900조원) 투자가 필요하지만, ADB는 연간 100억 달러 지원도 버거운 실정"이라며 “AIIB가 ADB와 WB 등 국제금융 기구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AIIB의 기금 모집 목표액은 1000억 달러이며 이 가운데 절반을 중국이 출연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 포럼에 참석해 “중국이 다자 국제금융 기구를 만드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IMF가 AIIB와 합작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용 WB 총재도 3월 22일 성명에서 “AIIB와 어떻게 협력하며 작업을 진행할 것인지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지식을 공유하고 공동으로 투자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IMF와 WB가 동시에 AIIB 설립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AIIB 설립은 IMF·WB를 양대 축으로 세계 금융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에 중국이 도전장을 내밀어 성공한 사례다. 미국이 주도하는 IMF·WB에서 중국이 행사할 수 있는 투표권은 3.8%와 5.2%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16.8%와 16%에 이르는 투표권을 갖고 있다. 일본이 주도하는 ADB에서도 중국의 투표권은 6.5%에 그쳐 일본(15.7%)과 미국(15.6%)에 한참 뒤진다. 그러나 중국은 새로 설립될 AIIB에서는 30% 정도 투표권 확보가 확실시된다. AIIB는 쉽게 말해 중국이 주도하는 ‘제2의 ADB’가 될 전망이다.
중국 주도 ‘제2의 ADB’
중국이 자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구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미국·일본 중심의 국제금융기구에서 영향력과 지분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ADB와 IMF에 줄곧 자국 지분의 확대를 요구했지만 현재 지분은 각각 5.5%와 4%에 그치고 있다. ADB는 1966년 출범해 역사가 반세기에 달하며 회원국은 67개국이다. 자본금은 1650억 달러(약 186조원)이며 본부는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고 본부 직원은 3000명이다. 역대 ADB 총재는 현직을 포함해 전부 일본인이 차지했다.
AIIB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10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아시아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다자 금융기구를 만들자”고 처음 제안했다. 중국 정부는 약 1년간의 준비 끝에 지난해 10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AIIB 설립 양해각서(MOU) 조인식을 열고 자본금 500억 달러(약 56조 원) 규모의 AIIB 설립을 공식 선언했다. 체결식에 참가한 창립 회원국은 중국을 비롯해 인도, 파키스탄, 몽골,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오만, 쿠웨이트, 카타르 및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9개국 등 총 21개국이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을 빼고 경제대국이 참여하지 않아 AIIB가 국제사회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은 한국, 호주, 인도네시아처럼 경제규모가 큰 나라들이 참가해 주기를 강력하게 희망해 왔다. 그래야만 AIIB가 WB나 ADB에 버금가는 국제금융기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경제 전쟁서 중국이 완승”
그러나 최근 몇 달 사이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인도네시아와 뉴질랜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가입함으로써 올 1월 초에 총 26개국으로 늘어난 회원국 규모는 마감 시한인 3월 말이 다가오면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유럽 선진국으로 확대됐고 회원국이 31개국으로 늘어났다.
서방 G7 국가들이 미국의 반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AIIB 가입을 결정한 데에는 미국과의 정치적 ‘의리'보다 중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실리’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신문은 최근 AIIB를 분석한 기사에서 “중국의 돈 자석이 미국 우방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면서 AIIB가 21세기 미·중 간 권력이동의 신호라고 지적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의 패권싸움에서 승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번 AIIB 설립을 둘러싼 전쟁에서는 중국이 완승했다"고 판정했다.
한국을 AIIB에 참여시키고 싶어 하는 중국의 희망은 중국 정부 대변인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훙레이 대변인은 3월 20일 한국의 AIIB 가입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이웃인 한국, 아시아 태평양의 중요한 국가인 호주가 관련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그간 중국이 AIIB 가입을 놓고 한국 정부를 설득하는 데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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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scottnearing@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