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지난 한 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갑을 간의 문제였다. 특히 갑의 횡포가 도를 넘다보니 약자인 을은 피해를 당하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을의 갑질’이다. ‘을의 갑질’은 건축계에서 특히 심하다. 갑인 건축주가 설계 및 건축을 을인 한 회사에게 의뢰하고도 힘없이 을에 끌려 다닐 수 있는 곳이 바로 건축계다. 을인 건축설계회사가 완공을 늦게 해도 부실시공을 해도 추가 공사대금을 요구해도 갑인 건축주는 건축물을 인수받으려면 해달라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다.
도자인형으로 유명한 오주현 작가도 ‘을의 갑질’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오 작가는 도자인형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우리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존 종이 인형과 달리 도자기법으로 만드는 인형은 제작과정이 까다롭다. 하지만 오 작가는 청아한 매력을 지닌 도자인형의 우수성을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오 작가의 이런 계획은 지난해 큰 암초에 부딪혔다.
건축 시작 한 달 만에
인부 인건비 미지급 사태
오주현 작가는 지난해 7월 24일 춘천시 만천리 산67-20번지에 지상 2층 규모의 춘천한국인형전시관을 신축하기로 하고 서울 소재 A건축설계사무소와 총 3억원 예산의 건축물 시공계약을 맺었다. 계약서 작성 후 오 작가 측은 계약금 9천 만 원을 즉시 입금했다.
하지만 착공은 계약서 작성 후 한 달도 더 지난 9월 19일에 시작됐다. 문제는 착공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작업이 4일씩 2회 총 8일이나 중단됐다. 알고 보니 A건축설계사무소 측이 인부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오 작가 측은 계약금 9천 만 원을 이미 입금 해줬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임금 미지급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황당한 일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A건축설계사무소 측은 오 작가에게 추가공사비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오 작가 측은 A건축설계사무소 측에 대한 신뢰를 잃어 추가공사비를 줄 경우 이 돈은 인건비, 재료구입비에만 사용할 것과 정기작업회의를 하자고 요구하자 10월 30일경 일방적으로 작업을 중단해 버렸다. ‘을의 갑질’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접수한 오 작가의 고소장에 따르면 인부책임자였던 김모씨는 “목수들의 인건비 미지급은 물론 공사 착공시 산재보험·고용보험이 선행 돼야 하는데 보험도 가입해 주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A건축설계사무소가 설계도면과 상이한 작업지시를 해 공사를 더 진행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13개 항목 부실시공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야
이런 가운데 A건축설계사무소 측은 갑자기 추가공사부분인 지하주차장과 본 건물 신축작업이 동시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건축주가 허락하지 않은 지하주차장 토목공사를 해 놓고는 토압으로 무너진다며 건축주를 압박하고 추가공사비를 요구해 왔다.
오 작가 측은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데다 그동안 A건축설계사무소의 시공상태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 건축전문가그룹에게 시공상황 진단을 요청했다. 그 결과 13개 항목에 이르는 부실공사를 발견했다. 대표적인 부실시공 사례는 기초하부 잡석다짐 및 버림콘크리트 작업을 하지 않은 점 등이다. 결국 오 작가 측은 감리회사에 감리를 요청했다.

감리회사의 감리결과는 더 심각했다. 감리보고서에 따르면 이웃토지와의 경계선상에 설치하기로 돼 있는 옹벽공사가 설계도면대로 돼 있지 않아 향후 구조물 붕괴가 우려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콘크리트 줄기초의 기초판이 시공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 확인됐다. 기초판이 없을 경우 건축물 완공시 하중분포 등 구조상의 문제가 중대해 설계도면대로 기초공사를 다시해야 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이뿐만 아니다. 건축물의 위치가 설계도면보다 1m 이상 이동돼 있어 사전설계변경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건축의 기본은 설계도면이다. 모든 건축물은 설계도면에 맞게 건축돼야만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설계도면과 다르게 건축이 될 경우에는 반드시 건축주와 상의해야 한다. 하지만 A건축설계사무소 측은 건축물 시공계약서상 2번 조항인 “건축 행정 및 공법에 관한 사항들은 공사시행자의 의견을 우선한다”는 조항을 들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감리회사가 밝힌 문제점들은 단순히 공법에 의한 문제가 아닌 설계 및 건축상의 문제인 만큼 반드시 건축주와 상의를 해야 한다. 게다가 A건축설계사무소 측은 건축주가 부실시공 상황을 알리고 잘못된 부분에 대한 철거요청을 내용증명으로 보냈으나 이를 회피하고 있다. 전시관 완공만을 기다리는 오 작가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며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공사비 지출 내역 의심
인건비 아직도 못 받기도
오 작가 측에 따르면 A건축설계사무소 측은 건축과정에서 생긴 문제 외에도 건축주 측을 속이는 행동을 여러 차례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것이 계약서 작성당시 A건축설계사무소의 존재 여부다. 계약서를 작성하던 당시 A건축설계사무소는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 오 작가 측에 따르면 계약금 9천만 원을 받은 이후 A건축설계사무소를 만든 정황이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현장 소장을 맡고 있던 이모씨의 경우 건축기술사 면허소지자로 소개했으나 실제로는 면허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또 계약금 9천 만원에 대한 사용처에 대해 의심을 받자 지난해 7월 24일부터 9월 12일까지 A건축설계사무소 이사로 있는 김모씨 계좌에서 현장소장인 이모씨 계좌로 총 8천5백만원을 송금해 실제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공사비 지출내역을 맞추기도 했다.
하지만 오 작가 측에 따르면 송금이 이뤄졌던 7월 24일부터 9월 12일까지는 실제 공사가 착공된 9월 19일 이전의 시기로 아무런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A건축설계사무소 측은 당시 이 돈이 목수인건비, 토목장비, 재료비 등으로 지불됐다고 했으나 실제 이 대금은 대부분 미지급 상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인부책임자였던 김씨의 증언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3개월이면 끝날 것이라던 공사가 해를 넘기자 오 작가는 심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다. 게다가 공사를 다시 해야 할 상황을 맞다보니 작품 활동에도 지장을 받고 있다. 우수한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세계에 알릴 도자인형 만드는데 온 힘을 다해도 부족한 상황에 전시관 건축과정에서 발생한 ‘을의 갑질’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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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