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 씨 자택서 손 묶이고 목 졸려 사망한 채 발견
도박 자금 마련 위해 오랜 인연 할머니 살해했나?
지난달 25일 오후 4시 50분께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의 어느 주택에서 함모(88·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주택 2층에서 발견된 함 씨는 두 손이 운동화 끈으로 묶여 있었고 목 졸린 흔적이 있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80대 할머니를 살해한 것일까.
소문난 자산가 함 씨
“외부인 굉장히 경계”
함 씨는 자수성가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자산가로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왔다. 시신이 발견된 2층 주택은 함 씨의 소유로 매매가는 15억~20억 원이다. 이 외에도 함 씨는 40평대 아파트 등 부동산 5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네 주민들도 함 씨에 대해 “소문난 자산가”라고 말한다. 또 함 씨는 평소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웃주민 A씨는 “함 씨는 외부인이 나타나면 굉장히 경계했다”면서 “속옷을 꿰매 입고 가정부도 들이지 않는 등 절약정신도 투철했다.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범행은 함 씨의 자산을 노린 누군가의 범행일까. 경찰은 함 씨가 석달 전 부동산 투자를 권유하는 협박성 전화를 받았던 사실을 확인했다. 함 씨의 조카며느리 김모씨는 경찰에서 “고모할머니와의 전화통화에서 ‘석달 전 땅 투자를 해보라는 남성의 전화를 받았다’고 들은 적 있다”며 “당시 고모할머니가 호통을 치자 언쟁이 오갔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또 사건 발생 보름 전 함 씨의 집에 복면을 쓴 남성이 침입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함 씨가 소리를 지르자 남성이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함 씨는 피해를 입은 것이 없다며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발생 이틀 전인 지난달 23일 오후 1시께 한의원을 다녀오는 함 씨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경찰은 함 씨가 잔인하게 살해된 데다가 누군가 협박전화와 침입한 점 등을 보고 이번 범행이 원한 관계에 따른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2일 뒤인 지난 9일 이웃주민 정모(60)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긴급 체포했다.
25년 알고 지낸 이웃
일용직 페인트공 일해
도곡동 재력가 살인사건의 범인 검거는 순탄치 못했다. 사건 현장에는 그 어떤 단서도 없었다. 주변 CCTV에도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바로 함 씨를 묶은 끈과 함 씨의 목에서 채취된 소량의 땀방울이었다. 경찰은 이 땀방울을 채취해서 국립과학연구소에 보냈다. 그리고 국과수는 그 땀방울에서 범인의 DNA를 발견했다. 범인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이에 경찰은 함 씨와 연관된 사람들 200여 명의 DNA를 확보했다. 그 중 60여 명의 DNA를 국과수로 보냈고 결국 국과수는 범인의 DNA와 정 씨의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은 사건 발생 12일 만에 용의자 정 씨를 긴급체포했다.
경찰 조사결과 정 씨는 2002년부터 2010년까지 함 씨의 주택 2층에 세들어 살았으며, 함 씨와는 25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정 씨가 과거 도박과 보험사기 전력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경찰은 정 씨가 도박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일용직 페인트공으로 일하는 정 씨가 도박 비용을 위해 재력가인 함 씨를 끈으로 묶어 협박한 뒤 살해한 것으로 추측됐다.
그러나 경찰에서 정 씨는 범행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자신을 함 씨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도박에 빠지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경찰은 범행 당일 정 씨의 동선을 역추적한 CCTV영상을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정 씨의 집에서 함 씨의 혈흔이 묻은 옷도 발견했다. 이를 증거로 경찰은 지난 10일 정 씨를 구속했다. 그러나 연이어 범행의 증거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정 씨는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과학수사의 첨단 기법
DNA감정의 결과
함 씨의 목을 조를 때 흘린 정 씨의 땀방울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됐다. 이는 우리나라 과학수사가 눈부시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인간의 땀에는 DNA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의 DNA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땀 속에 있는 생체·표피세포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다.
함 씨의 목을 조르는 과정에서 정 씨의 손톱 밑에 있는 땀방울이 묻은 것이다. 정 씨는 사건현장에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손톱 밑 땀방울이 범행을 밝힐 증거가 될 것임은 예상치 못한 상황임이 틀림없다.
이제 남은 것은 정 씨의 범행동기를 밝혀내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정 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범행 동기 등을 집중 조사할 예정”이라며 “지금까지 확보한 각종 증거물들을 면밀히 살펴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